예레미야 23:9-20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소위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에 대한 독설에 이르자 예레미야는 마음이 상하고 뼈가 떨리고 술취한 듯 혼미해 진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간음을 지적하신다.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다 사악하다고 하신다. 그들의 길(습관)이 그들을 어두움에 빠뜨리고, 죄인의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져 하나님의 재앙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하신다.

사마리아 선지자들은 어리석어 하나님 대신 바알을 의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되게 했다. 예루살렘 선지자들도 간음, 거짓, 악행하는 사람들을 옹호했다. 하나님은 (구원이 아니라)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로부터 나와 온 땅에 퍼진다고 하신다.

결국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말라고 경고하신다. 선지자들의 말은 헛된 것이요,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멸시(모독) 하는 사람들에게도 평안을 전하고, 이웃에게 완악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도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샬롬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들을 벌하신다.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여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으면서 선지자라고 하는 자들을 악인이라고 하신다. 바람에 나는 겨와같은 존재다. 의인의 회중에 (하나님의 회의에) 들어갈 수 없다. 주님의 날에 확연히 밝혀질 것이다.

// 단순히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나 교훈이 아니다.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사장들이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보혜사 성령의 깨닫게 하심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들 거짓 선지자와 제사장들과 다를게 없다.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고 (하나님 사랑이 없고) 이웃에게 완악하게 행하면 (이웃사랑도 없으면) 교회지도자들이 샬롬을 외친다 해도, 의인의 회중에는 들어갈 수 없다.

예레미야 23:1-8

하나님의 백성을 맡은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돌봐야 한다. 그런데 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을 흩어지게하고, 쫓아내고, 돌보지 않았다. 이 지도자들의 악행에 하나님이 벌하셔서 유다는 포로로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자들을 (순종하는 백성들일 것이다) 흩어졌던 곳에서 모아 다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자손을 낳으며 번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깨서 친히 지도자들을 세워주셔서 백성들을 돌봐 주실 것이다. 백성들은 다시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버림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때의 징표로 다윗가문에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왕으로 세우실 것이라고 하신다. 이 왕이 지혜롭게 (하나님께 순종해서) 왕노릇 해서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다. (우리는 이 왕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안다. 아멘)

그의 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리라) 유다도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도 평안히 살고, 왕을 ‘하나님은 우리의 공의시다’ 라고 부를 것이다. 더이상 육적 출애굽의 하나님만이 아니시다. 영적 대적인 세상나라와 죄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셔서 하나님나라에 살게하신다. (예레미야의 말을 듣는 일차 독자들은 이 신비를 모르겠지만 우리는 안다)

// 하나님이 남은자들을 불러모아 다스리시는 나라도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나라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지혜롭게 다스리는 것을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나라의 특징이다. 정의와 공의가 없으면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교회가 아니다. 사랑은 정의와 공의를 이웃에게 지키는 것이다.

예레미야 22:20-30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21)

습관이란 ‘인생 길’ 이다. 삶의 방식이요 태도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한다. 유다는 어려서부터 불순종이 습관이었다. 악인의 꾀를 좇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다. (죄인의 길에서의 길이 습관이다)

세상은 자기계발을 위해 일곱가지 습관을 가르치지만 (한국어 번역서 제목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이지만, 성공과 효율있게 일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인생은 어려서부터 죄인의 길에 선다고 가르친다. 세상에서 가르치는 좋은 습관도 죄인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진 못한다.

죄인의 길에 서면 그 결과는 수치와 욕을 당하는 것이다.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간 여호야긴 왕 (고니야)를 언급한다. 고니야는 다윗과의 언약을 이어갈 여호야김 왕의 아들이었어도 마치 인장도장을 빼어 대적에게 넘겨주듯, 하나님께서 친히 바벨론으로 하여금 고니야를 잡아가 이방땅에서 죽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고니야는 천한 그릇도 깨진 그릇도 좋아하지 않는 그릇도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깨끗하지 않은 그릇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30)

그러나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의 완성은 은혜다. 죄인의 습관을 고쳤기 때문에 주어진 상급이 아니라 여전히 죄인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주어진 은혜다. 은혜를 받았으니 새로운 습관을 따라야 한다. 우리 힘으로 안되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혼자서는 안되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

예레미야 22:10-19

예레미야가 유다 왕의 집에 친히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21장에 이어 시드기야 왕에게 하는 하나님 말씀이리라. 선왕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요시야가 죽고 백성들에 의해 왕이 된 여호아하스가 살룸. 살룸은 반 애굽 정책을 폈다가 왕위에 오른지 석달만에 애굽으로 잡혀가 죽었다. 요시야의 죽음은 애통하거나 울일이 아니라고 하신다. 왜? 요시야는 하나님보시기에 정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살룸을 위해 슬피 울라고 한다. 그는 애굽에 잡혀가 포로지에서 죽어 조상의 무덤에 장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살룸대신 애굽에 의해 세워진 왕이 여호야김. 그는 요시야 왕이 먹고 마시는 것보다 정의와 공의를 준행해 형통했던 것과 다르게 백성들을 불의하게 부려먹고 자신을 위한 탐욕적 왕이었다. 요시야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한 것과 다르게 탐욕으로 가득차 백성들을 압박과 포악으로 착취했다. 성경은 요시야 왕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해서 형통한 것을 요시야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곧 영생아닌가? 영생이 있으면 이 땅에서 죽어도 애통하거나 울 이유가 없다.

반면, 탐욕으로 가득해 백성들을 착취한 여호야김에 대해서는 누가 슬퍼하고 통곡하겠냐고 반문한다. 그냥 성문밖에 던져져 나귀처럼 매장 당해도 슬퍼하거나 울어 줄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

// 살룸은 백성들이, 여호야김은 애굽이 왕으로 세웠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왕을 세우시는 전통이 언제부터 깨졌을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그러면 정의와 공의를 준행한다.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변호해야 한다. 이것이 형통의 참 뜻이다.

예레미야 22:1-9

시드기야의 간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분명했다. (21장) 기도한대로 들어주시지 않았어도 기도에 대한 답을 주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예루살렘에 보내 기도 응답을 하신다. 반복하신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침공은 유다가 정의와 공의대신 압제와 학대로 무죄한 피를 흘린 벌이라고 하신다. 바벨론은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범죄한 유다를 치시는 도구였다.

압제와 학대를 그치고 정의와 공의를 준행하면 다윗왕위를 회복시키신다고 하신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다윗가문도 황폐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왕위를 아끼셔도 불순종은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는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다른 신들을 섬긴 결과는 황폐함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응답은 정의와 공의를 준행하라는 것이다.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