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1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에게 있다.)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떠나리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답하신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분명하다. 너희 대적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치실 것이다. 나 하나님이 너희를 긍휼히,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다고 하신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대항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화를 내리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바벨론 왕을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벌을 거두시지 않는다. 죄 값을 치루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대로 벌하실 것이다. 성전신앙, 예루살렘신앙에 사로잡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유다 백성들이 당한 운명이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우리는 순종하는 백성들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는 것은 우리의 순종이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드기야의 기도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분명했다. 살고자 하느냐 그러면 나가서 항복해라. 포로로 노예로 잡혀가겠지만 말이다.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한다면 포로로 잡혀가도 분명 소망을 기대할 수 있다.)

유다의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죄악과 악행을 불의한 재판이라고 하신다. 착취당하고 압박당하는 자에 대한 정의가 사라졌다. 하나님 없는 삶, 신앙이 종교화되면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간데없고, 죽은 신조, 전통만 남고 하나님은 우상화 된다. 그래서 정의가 실종된다.

세상에 항복해야 살아 남는다. 세상에 포로가 되어야 우리가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포로 취급했던 잘못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430년 노예 생활보다 더 걸린다 하여도 결국 살아남는다.

지금 교회의 대적은 그냥 세상이 아니라 어쩌면 하나님이시다. 교회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지 않는 불순종 때문이 아닐까? 을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의를 상실한 갑질문화의 주역이기 때문은 아닐까 반성 반성 반성을 한다.

로마서 16:17-27

성도들은 가족공동체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나라다. 먹고 마시는,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나라가 아니다. 교훈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슬러 서로를 받아주지 못하고 분쟁을 일으키거나 죄를 짓게 하는 사람들을 살펴 그들에게서 피하라고 권면한다. 저들의 교활한 말고 아첨하는 말에 속지 말라고 한다. 해오던 대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말씀에) 순종하라고 권한다. 선한데 지혜롭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악한데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에) 미련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우리 발아래도 굴복시켜 평안을 주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의 은혜다.

바울뿐만 아니라 디모데도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도 로마 성도들에게 문안한다. 대필하고 있는 더디오, 교회를 돌보는 가이오, 재무관 에라스도, 형제 구아도도 로마성도들에게 문안한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간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 양자가 되는 영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명백해졌다고 선언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이 성경에 기록한 대로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는 그 신비(은혜)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 복음을 견고케 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세세토록 돌리는 이유다. 아멘

로마서 16:1-16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존재다. 시간적 지리적 한계가 없다. 영생을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를 알기 때문이다. 겐그리아 교회 뵈뵈편에 편지를 보내는지 바울은 뵈뵈자매를 주님 안에서 영접해달라고 부탁한다. 뵈뵈가 많은 사람을 도와 주었고 바울도 도와 주었듯이 (로마 성도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일이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일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이다) 그렇게 뵈뵈를 대하라고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라는 것은 바울이 언급하는 사람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언제 로마로 돌아갔을까?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통해 바울은 그들이 모이는 교회의 성도들과도 이미 영적인 교제를 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첫 열매 에배네도, 많은 수고를 한 마리아, 감방동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특별히 바울은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라고 소개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름들. 주안에서 사랑하는 암블리아, 동역자인 우르바노, 스다구, 인정받는 아벨레, 아리스도불로의 가족, 친척 헤로디온, 나깃수의 가족, 열심히 일하는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그리고 버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모친. 바울은 루포의 모친이 곧 자신의 모친이라고 소개한다.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 자매들.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람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바울의 문안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로마 성도들에게 문안한다고 적는다.

가본적이 없는 로마지만 로마에는 셀 수 없을 만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을 공유한 성도들이 있었다. 바울은 로마성도들에게 이것을 나누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거룩함. 복음의 열매다.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예수님을 찾는다는 무리의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3:35)

성도는 가족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소개하지 않는가? 아마 루포의 어머니는 바울을 자식처럼 대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성도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로마서 15:22-33

바울은 로마에 여러번 가고자 했었나보다. 여러번 막혔다고 한다. 로마에 가고자 한 이유는 바울이 있는 지방에 (더이상) 일할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스페인으로 갈 때 로마를 들려 로마 형제들과 교제하고 로마 형제들의 파송으로 스페인으로 가기를 바란다고 편지한다.

그럼에도 우선순위는 일단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연보한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이방인 성도가 유대인 성도들을 돕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라고 한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서로 돕는 것이다. (이웃사랑이 준법이다.)

바울은 자신의 땅끝이 스페인이라고 다시 천명한다. 로마에 들렀다가 스페인에 가겠다고 한다. 바울이 로마 형제들에게 갈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란 무엇일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어쩌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서로를 위한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가는 길은 바울이 이방인 성도들에게도 받아지고 유대인 성도들에게도 받아지는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바울과 로마 형제들의 만남이 곧 바울이 가지고 하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 아닐까?

바울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로마 성도들을 향해 나가길 원했다. 로마 성도들과 편히 안식의 기간을 보내길 원했다. 그때까지 평강의 하나님께서 로마 성도들과 함게 계시길 기도한다. 아멘

// 이 지방에 이제 일할 곳이 없고. 오늘의 도전 구절이다. 선교사의 사역은 전인격적이고 총체적이다. 그러나 선교사가 만능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일을 해도 선교사마다 받은 은사가 다르다. 따라서 한 지역에 여러 선교사가 협력하여 사역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바울이 혼자 다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요즘들어 하는 많이 생각하는 것중의 하나가 뼈를 묻는 것이다. 나는 뼈를 묻는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거의 없지만 민족과 열방을 향해 나가시는 분들을 보면 많은 분들이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나간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안주하기도 한다. 돌아갈 곳도 없고 각자의 서바나, 곧 땅끝도 없다. 안주 하시는 분들은 땅끝까지 왔다고 생각하나보다. 난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가고자 하면서 너희와 함께 편히 쉬고 싶다는 기도 제목을 나눈 것이 인상적이다.

이제 일할 곳이 없고. 너희와 함께 편히 쉬고 싶다. 하루종일 생각해야 할 문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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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라는 바울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선교는 총체적이고 전인격적인 일이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일을 한다고 하여도 모든 선교사가 만능은 아니다. 선교사마다 받은 은사는 다양하다. 따라서 한 지역에 여러 선교사가 협력하여 일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바울도 혼자 다니지 않았다.

‘이제는 (주님의 시간과) 이 지방 (주님이 보내신 곳)’에 대한 분별이 필요하다. 바울은 땅끝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다. 안주하지 않았다. 이방선교에 뼈를 묻었지 어느지역, 어느 민족에 뼈를 묻겠다고 하지 않았다. 바울이 전문성이 부족해서 나그네 전도자로 산 것도 아닐 것이다.

이런 바울이 로마 성도들과 나눈 마지막 기도 제목이 참 인상적이다. 너희와 함께 편히 쉬고 싶다. 바울은 땅끝을 지향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쁜 마음으로 하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간구한다. 바울은 얼굴을 맛댄적도 없는 로마 형제들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을 소망한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다.

로마서 15:14-21

 

14절이 도전된다. 성도들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해야 한다. 여기선 선은 하나님으로 대체되는 선과는 다른 단어다. 양선, 착함으로 번역되는 선한행실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삶 없이 지식을 떠들어봤자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한 행실이 있고 지식으로 권하면 듣는다. 성도들은 서로에게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이 선함으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고 적는다. 나는 선함이 가득한가?

  1. 바울이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맡아 이방인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표현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12장 1절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과 같이 이해하더라도 내가 나의 몸(삶)을 영적 예배로 드리는 것과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는 표현이 좀 세다. 아마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 된 지체라 당연한 것인가? 그러고보니 12장 1절도 형제들에게 (복수) 주어진 말씀이고 나의 몸이 아니고 우리 몸이다.

17-18 바울은 이방인들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데 자신이 도움이 되었다고 자랑한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 달리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학교나오니 여유가 덜하다. 복음이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하고, 착한 행실로 서로 권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