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4:8-22

주님의 마음을 돌이키자. 시드기야 왕과 유다 백성들이 가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바벨론에 에워쌓임을 당한 이유를 정의와 공의 짓밟았기 때문이라고 주님이 끊임없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들은 정의와 공의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자 동족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로 했다는 뜻일 것이다. 주님은 동족 노예를 풀어주는 것은 율법에 따라 마땅한 행동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쩌랴. 마음에 없는 순종의 모먕으로 어찌 주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으랴. 마음에 없는 순종의 모양은 능력이 없다. 당연히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얼마지나지 않아 노예를 풀어주는 행위가 아무런 효험이 없자 그들은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노비로 삼았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다시 히브리 노예에 관한 율법을 상기시켜 주신다. 그리고 선조때부터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고 지적하신다.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계약은 주님앞에 마땅하고 바른 일이었는데 너희가 돌이켜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노비로 삼았다고 책망하신다.

주님은 동족 노예를 자유케 하지 않은 백성들에게 대신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칼과 전염병과 기근이 유다 백성들을 대적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칼과 전염병과 기근으로 유다 백성들이 세계 여러나라에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이 모든 것은 유다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 결과다. 유다의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드기야 왕부터 모든 백성까지 바벨론에게 넘기신다고 하신다. 유다 성읍들을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정의와 공의는 주님을 사랑하는 어쩌면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들은 정의와 공의의 모양만 있고  정의와 공의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다.

//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2~5)]

//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지 않으면 교회도 황무지가 될지도 모른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