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3

예레미야는 주님의 기도응답을 백성들에게 말했다. 무리들이 애굽으로 내려갈 구실을 찾으려고 거짓으로 기도요청을 한 것임이 들통났다.

유다에 남은 자의 무리를 이끄는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라고 강하게 반항한다. 차마 선지자 예레미야를 직접공격하지 못하고 바룩이 예레미야를 부추겼다고 에둘러 말하지만 불순종의 영이 그들을 지배한다.

예레미야에게 반항하며 말한 사람들에게 모든 “오만한 자”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저들은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 악인들이다. 불순종 한다.

유다에 남겨진 무리들은, 쫓겨 났다가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 온 자들은 불순종하여 애굽땅으로 갔다. 예레미야와 바룩도 데리고 갔다.

애굽땅에서도 주님의 말씀은 예레미야를 통해 계속된다. 애굽을 피난처로 삼으면 그곳에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으리라는 말씀을 구체화 하신다.

제일 먼저 칼이다. 주님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와 칼로 얘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 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 불순종할 것이면서 주여 삼창을 하는 기도나, 불순종할 것이면서 여전히 성경책을 펴는 묵상이나, 불순종할 것이면서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임마누엘이, 주님이 함께 하심이 구원이라는데. 주님은 순종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데.

예레미야 42:15-22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남은 백성이 애굽을 피난처로 생각하고 그곳으로 간다면 잘못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고집하지 말라고 하신다.

만약 애굽으로 피난 간다면 칼과 기근이 애굽으로 따라갈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것도 급히 따라 갈 것이라고 하시며, 애굽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칼과 기근에 혹 살아남아도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지금의 재난은 주님께서 내리시는 재난이라, 이 재난에서 벗어나서 살 자가 없다고 하신다.

주님은 강경하시다. 예루살렘에 부은 분노하심을 피난간 애굽에서도 붓겠다고 하신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를 피난처로 삼지 않고) 애굽을 피난처로 삼는 것 자체가 불순종의 극치다. 주님은 이런 백성을 가증하다고 하신다. 애굽으로 피난간 백성은 바밸론으로 포로잡혀간 백성과 달리 놀램과 저주와 치욕거리가 되며 다시는 유다땅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다의 남은 자들아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아라.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미야를 통한 경고다. 너희들이 내게 부탁한 기도에 대한 주님의 /기/도/응/답/이다. 너희는 순종이 아니라 애굽으로 피난할 구실을 찾기 위해 너희 마음을 감추고 나에게 기도 요청을 하였지만 주님의 뜻은 변하지 않는다. 주님의 기도응답에 순종할 마음이 없는 너희여, 너희가 가서 피난처로 삼고자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을 줄 분명히 알아라.

// 그렇다. 우리의 피난처는 주님 한분이시다. 임마누엘이 구원이다. 주님은 순종하는 백성과 함께 하신다. 그러니 순종하는 곳에 구원이 있다.

예레미야 42:1-14

그다랴는 죽고 요하난이 이끄는 남은 무리는 애굽으로 가려고 (이미) 떠나 베들레헴 근처 게롯김합에 머물렀다. 여기서 이들은 예레미야를 만난다. 왜 예레미야가 이곳에 있었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 동행했는지도 모른다. 그저 존재감이 없었을 뿐이었나?

하여간 진퇴양난의 상황에서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주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기도는 우리의 필요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무리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주님께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여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응답을 숨김없이 대답하겠다고 한다. 무리도 주님이 예레미야에게 주신 응답에 순종하겠다고 (주님을 증인)으로 약속한다.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늘로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만큼 순종은 어려운 것이다. 순종 역시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간 무리들은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 (좋든지 좋지 않듣지) 순종하겠다고 약속한다. 순종하면 복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절박하고 절실했다. (순종이 그만큼 힘들다는 반증이다.)

십일 후에야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 급해 죽겠는데 열흘이나 걸렸다. 열흘이면 애굽에 도착할 수 있는 기간일 것이다. 예레미야는 애굽 피난 길의 모든 사람들을 부르고 주님의 /기/도/응/답/을 전했다.

주님의 기도응답은 애굽으로 가지 말고 이땅에 눌러 앉아 살라는 것이었다. 주님이 세우시고 헐지 않으시며, 주님이 심으시고 뽑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주님이 내린 재난을 돌이키셨다고 하신다. 그러니 바벨론 왕을 겁내지 말아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시며, 바벨론 왕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겠다. 바벨론 왕에게도 너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어 너희를 본향에 돌려보내도록 하겠다.

그러나 만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이 땅을 떠나 애굽으로 피난 간다면, 애굽 땅으로 가면 전쟁도 없을 것이고 나팔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고 양식도 궁핍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될 것이다.

//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임마누엘이 구원이다. 주님은 순종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결국 순종이 구원이다. 그러면 구원은 순종이 된다.

// 구원받았습니까? = 순종하십니까?

// 입으로 아무리 ‘미쉼니다’해도 순종이 없으면 구원은 저 멀리 있다. 내 가슴도 저린다.

 

예레미야 41

일곱째 달이니 예루살렘 함람(네째달 구일)후 석달정도 지났다고 해야하나.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로서 왕의 장관인 이스마엘. 혈통적으로 뿐만 아니라 척화파에 동조했던 시드기야 왕의 절대적 추종자라고 해야 하나.

이스마엘이 열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그다랴와 함께 떡을 먹다가 (주화파인)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다. 암살이 아니라 그다랴와 함게 있던 모든 유다사람과 그다랴을 지켜주던 바벨론 군사까지 죽였다. 미스바학살 수준이었다.

이 학살 소식은 이틀동안 미스바 밖으로 퍼지지 않았다. 미스바에서 학살이 있었던 때에 80명의 사람들이 (행색을 보아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었을 것이다)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를 거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다.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은 자신도 슬픔에 잠긴 순례자인양 위장하고 팔십명의 순례자들을 만나 그다랴에게로 가자고 꾀었다. 그리고 그들을 죽여 구덩이 가운데 던졌다. 다만 팔십 명 중 열 사람은 가지고 있던 먹을 것을 댓가로 목숨을 구한다. 이스마엘은 이들을 형제처럼 대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살인은 살인을 낳고. 이스마엘은 미스바에 남아 있는 왕의 딸들 (예루살렘 함락시 피난해 왔을까?)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암몬으로 출발했다. 그제서야 미스바 학살사건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다른 패잔군 유다 장교들에게 알려졌다.

요하난은 사람들을 모아 이스마엘과 싸우러 나갔다. 암몬으로 포로로 잡혀가던 사람들은 요하난을 보고 기뻐했다. 포로들이 요하난 편으로 돌아서자 이스마엘은 여덟 명과  (둘은 어딜갔을까? 요하난에게 잡히거나 죽었을까?) 암몬으로 도주했다.

요하난과 다른 장교들은 이스마엘이 미스바에서 암몬으로 끌고가던 포로들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요하난의 입장은 난처했다. 바벨론이 세운 그다랴가 살해되었고 미스바 학살로 바벨론 군사까지 죽은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운 그는 무리들과 함께 애굽으로 가려고 떠나 베들레헴 근처 게롯김합에 머물렀다.

// 그다랴는 이스마엘이 자신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거짓첩보라고 말했지만, 그래서 이스마엘을 환대했지만 결국 치밀한 이스마엘의 계획에 당하고 말았다. 악은 철두철미하다.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악에게 진 것이다. 주화파 그다랴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살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따랐다. 유다의 남은 자들을 이끌어야 할 그다랴의 천하는 석달만에 끝났다. 첩보에 대하여 안일하게 생각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연속적인 삶이어야 한다. 예레미야가 아직 포로로 잡혀가는 중에 일어난 사건일까? 주님이 허락하신 일도 끊임없는 반대에 부딪힌다.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끊임없이 말씀에 의지해야 하고 끊임없이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삼가 순종해야하는 길이다.

// 그다랴의 죽음을 단순한 부주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인지도 모르고) 이스마엘을 환대한 그다랴의 태도를 어쩌면 배워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수까지도 환대하는 것이 (죽더라도) 바른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예레미야 40

예레미야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있었다. 39장에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사령과 느부사라단에게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라고 명령했는데, 전화도 카톡도 없는 시대라 명령이 늦게 전달되었으리라.
주님은 예레미야가 풀려난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아무리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라고 해도 여호야김부터 시드기야까지만 따져도 20년이상 반복된 재앙의 예언이 바벨론 정보부대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리 없다. (우리 역사에도 서동요 이야기가 있다.)
느부갓네살이 사령관에게 예레미야를 선대하라는 명령을 내린 이유역시 말씀의 성취에 대한 경외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령관이 예레미야에게 한 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곳에 이 재난을 선포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를 마음에 담은 유다 백성들은 얼마나 될까?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현장에서 예레미야는 꼼짝달싹을 못한 것 같다. 자신만 포로에서 풀려나서 일까? 아니면 불타버린 예루살렘에는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어서 일까? 예레미야는 사령관의 제안에 따라 바벨론 왕이 유다성읍들을 다스리도록 한 그다랴가 있는 미스바로 가서 그다랴와 함께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들과 살았다.
남은 백성들은 그다랴를 중심으로 모였다. 바벨론에 패한 유다군의 장교들은 숨어있다가 그다랴에게 나왔다. 그다랴는 장교들에게 바벨론은 섬기라고 권면했다. 바벨론을 섬기는 것이 잘되는 길이라고 말했다. 모압과 암몬으로 피난길에 올랐던 많은 유다 사람들이 그다랴를 중심으로 모였다. 그해 포도주와 여름 과일 수확은 (주님의 은혜로) 풍성했다.
폭풍전야가 아니라 폭풍후 평안이라고 해야하나. 그러나 어두움은 어디에나 내려진다. 암몬 왕이 그다랴의 목숨을 노린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패잔병 장교였던 요하난은 그다랴의 목숨을 노리는 이스마엘을 죽이겠다고 한다. 그다랴가 암살당하면 남은 유다사람들 마져 흩어지고 말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러나 그다랴는 그 첩보는 거짓이라고 말한다.
// 세상도 성경 말씀을 안다. 어쩌면 더 잘 안다. 그러나 주님 재림의 성취까지는 순종하는 자가 적을 것이다. 심지어 가시적 교회내에서도 순종하는 자가 적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러나 내가 다시 올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냐고 반문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적은 무리지만 믿는 자에게 하나님나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