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9

드디어 말씀대로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을 함락되었다. 시드기야 제 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이었다.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 수중에 떨어졌다.

시드기야 왕은 도망쳤으나 바벨론 군에 의해 잡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혀갔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죽였고 시드기야의 눈을 뺀 후 바벨론으로 잡아갔다.

갈대아 인들은 예루살렘 성을 불태웠다. 성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잡아갔으며 폐허가된 예루살렘에는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에게 남겨 주었다.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에 남아 전쟁을 마무리하는 사령관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를 선대하고 예레미야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명하였다.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서 풀려나 (주화파)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가 (남은) 백성들과 살았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구해 준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 관하여도 예레미야에게 통해 말씀하셨었다. 예벳멜렉은 예루살렘 성이 함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성이 함락되는 날 주님이 에벳멜렉을 구원하여 바벨론 손에 넘기지 않으실 것이다. 이는 네가 (에벳멜렉이) 나를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 예루살렘 함락은 말씀대로 성취되었다. 재앙의 예언을 선포한 예레미야와 재앙의 예언을 믿은 이방인 에벳멜렉은 구원받았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은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졌다. 이 땅에서 아무런 소유가 없었던 가난한 자들에게.

// 손가락을 베었다. 검지에 붕대를 감고 있으니 타이핑이 ㅠ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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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이야기에서 신약의 복음을 오늘도 그대로 만난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행28:28)

예루살렘 함락 때에 울린 구원의 노래
1. 함락되고 불타버린 예루살렘 땅은 빈민들, 그 땅에서 아무런 소유가 없었던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졌다.
2. 이방인 구스사람 에벳멜렉은 주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 그는 재앙의 예언을 주님의 말씀으로 들었다.

예레미야 38:14-28

시드기야 왕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예레미야가 할 때까지 끊임없이 묻는다.
예레미야는 재앙의 예언자였다. 아니 주님께서 그 시대에 주신 말씀이 재앙이었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예언이 바뀔 수 없음을 알았다. 예레미야는 인지상정을 먼저 얘기한다. 자신이 숨김없이 재앙을 예언하면 왕이 자신을 죽이실 것이요, 결국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며 예레미야에게 다시 물었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전한다. 바벨론의 왕이 보낸 장군들에게 항복해야 한다. 그래야 너는 목숨을 건지고 이 성은 잿더미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너와 너의 집안 식구들이 모두 살 것이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성은 바벨론의 손에 넘어가고 그들은 이 성을 불태워 버릴 것이고 너도 그들의 손에 잡힐 것이다.
시드기야 왕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못한다. 예레미야에게 이미 바벨론에 투항한 유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해를 당할까봐 두렵다고 말한다. 예레미야는 항복을 하면 해들 당하지 않는다고, 제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순종만이 형통이요 목숨을 건지는 길이라고 대답한다. 오히려 항복하지 않으면 주님이 말씀하신 재앙이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고 반복한다.
그리고 항복하지 않으면 왕궁에 남아 있던 여인들도 잡혀가면서 재앙의 책임을 왕에게 전가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왕과 가족들도 잡혀갈 것이고 예루살렘도 불에 타게 될 것이라고 반복한다.
시드기야는 자신의 귀를 막아버린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입도 막아버린다. 시드기야는 재앙의 예언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잡아 둘 계책까지 알려준다. (자신의 생명과 나라의 운명은 몰라라 하면서 예레미야의 생명은 챙겨준다.) 우습지 않은가? 지난 40년가까이 재앙의 예언이 일관되게 전해졌건만 듣는 귀가 없었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를 버리게 하소서

예레미야 38:1-13

주님이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을 척화파 고관들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의 건지리라’로 들렸다. 명분을 중요시 하는 척화파들은 예레미야를 주화파로 몰아부쳤다.

척화파 고관들의 바람은 아리러니하게도 평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선지자라면 백성의 평안을 구해야 하는데 오히려 재난을 구하니 (이런 예레미야도 평안에 아멘 했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백성의 뜻을구하는 자가 아니요 주님의 뜻을 대언하는 자가 아닌가?) 예레미야는 척화파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시드기야는 척화파들의 명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척화파들은 명분을 앞세워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집어넣었다. 시드기야는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번뇌했을 것이다.

예레미야에 대한 개인적 구원의 손길은 엉뚱한 곳,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으로부터 왔다. 주님은 이방인이요, 내시인 에벳멜렉을 사용하셨다. 그도 척화파들의 행동이 악하다는 것을 알았다. 정치적 종교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원수를 굶겨죽이는 것은 악한 것이다라고 시드기야 왕에게 충언했다.

시드기야 왕은 에벳멜렉의 말을 듣고 예레미야를 구하라고 명한다. 에벳멜렉은 헝곂과 낡은 옷으로 밧줄을 만들어 내려보내 예레미야를 끓어 올렸다.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로 옮겨져 척화파로부터 보호받았다.

// 구스인 내시는 씨없는 자다. 씨를 뿌릴 수 없는 자이기도 하지만, 이방인이니 말씀이 없는 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에벳멜렉이 말씀을 맡은 자, 유다의 고관들보다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말씀에 따른 삶이 있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 말씀을 맡은 예레미야도 살기 위해서는 씨없는 자 내시의 말에 순종해야 했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명분과 실리는 공존할 수 없는가?

// 예레미야는 마치 요셉이 구덩이에서 건져냄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린 것 처럼, 구덩이에서 건짐을 받아 시위대의 마당에 갇혔다.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누리는 형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종종 다르게 이루어진다.

예레미야 37:11-21

애굽의 출정소식으로 바벨론 군대는 잠시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틀린 것처럼 보인다. 평화를 외치던 거짓선지자들이 예언이 응한 것처럼 보인다.

예레미야는 ”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주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28:9)

이런 예레미야가 (무슨 이유였던 간에) 예루살렘을 떠나고자 하였으니 척화파 사람들은 주화파 예레미야를 바벨론으로 망명하려고 했다고 의심하여 잡아 가둔다.

이 와중에 시드기야 왕은 은밀하게 예레미야에게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예레미야는 평화를 예언한 선지자들이 어디있느냐고 반문한다. 예레미야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확실한 말씀, 재앙의 예언을 다시 전한다. 그러면서 땅굴에 다시 가두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감옥 뜰로 옮겨주고 먹을 것도 주었다.

// 시드기야 왕은 끊임없이 평화의 예언을 듣고자 했다. 예레미야를 참 선지자로 알았기에 예레미야로부터 평화의 예언을 듣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언은 선지자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온다.
// 애당초 주님이 주신 예레미야가 전한 재앙의 예언은 해피앤딩의 예언이 아닌가? 그런데 재앙이라는 과정이 발목을 잡았다. 반대로 평안하다 평안하다는 예언은 예언이 아니다. 바람일 뿐이다.
// 선지자를 볼모로 잡고 먹을 것을 준다하여도 주님이 뜻을 바꾸실리 없다. 그러니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뜻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다.

예레미야 37:1-10

다시 시드기야 왕. 아이로닉하게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유다 왕이되었다. 주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친바벨론이 되어야 산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 왕과 신하들은 반바벨론이 된다.

시드기야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 /우/리/를 위하여 /우/리/ 주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한다.

타이밍이 맞아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출정했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 군대는 잠시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응답은 이게 아니었다. 주님은 예례미야에게 시드기야 왕이 보내 온 사람들에게 “너희를 도우려고 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아 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라고 대답하게 하셨다.

주님의 기도응답은 변함이 없다. 주님을 /우/리/ 편이라고 우겨도 소용이 없다. /우/리/가 주님편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고 하신다. 바벨론이 포위를 풀고 떠날 것이라고 자기 암시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신다. 잠시 포위를 풀었어도 결국은 다시 돌아아 애워쌀 것이라고 하신다. 아니 설령 싸워서 갈대아인의 온 군대를 물리친 것 같아도, 패망한 갈대아 인들에 의해서라도 예루살렘성은 불살라질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뜻을 굽히지 않으신다. /우/리/로 /우/리/의 뜻을 굽히라고 하신다.

주님의 뜻을 바꾸려고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마치 애굽이 출정하여 바벨론이 철수했던 것처럼, 설령 상황이 꼭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처럼 변할 수 있지만 주님이 뜻을 바꾸신 것도 기도응답도 아니다. 결국 애굽은 철수하고 바벨론은 더 큰 산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바벨론이라는 산을 움직이는 것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다. 그러니 우리는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