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6:20-32

바룩에게 돌아가서 예레미야와 함께 숨으라고 말한 고관들은 바룩의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두루마리를 보호하려는 의도였을까?) 왕에게 나아가 보고했다. 그러나 왕은 즉시 여후디를 보내 그 두루마리를 가져와 낭독시켰다.

말씀을 직접 들으려고. 천만에 말씀이었다. 여후디가 일정한 양을 읽어내려가면 읽은 만큼 두루마리를 칼로 베어 화로불에 던져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다. 말씀을 들으려는 태도가 아니라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왕과 신하들은 (재앙의) 예언을 듣고 마땅히 주님 앞에 두려워 떨며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회개의 자리로 나가야 하는데, 도리어 말씀의 두루마리를 찢어 태우다니. 신하들 중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충언을 했지만 (주님의 말씀도 듣지 않는 ) 왕이 신하들의 말을 들었을리 만무다. 왕은 바룩과 예레미야를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숨겨주셨다.

두루마리는 태워졌으나 주님의 말씀이 불살라진 것은 아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다른 두루마리에다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다시 기록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여호야김 왕에게 전하는 에필로그도 더해주셨다.

“나 주가 말한다. 너는 예레미야에게 ‘왜 두루마리에다가, 바빌로니아 왕이 틀림없이 와서 이 땅을 멸망시키고 사람과 짐승을 이 땅에서 멸절시킬 것이라고 기록하였느냐’ 하고 묻고는, 그 두루마리를 태워 버렸다. 그러므로 유다 왕 여호야김을 두고서 나 주가 말한다. ‘그의 자손 가운데는 다윗의 왕좌에 앉을 사람이 없을 것이요, 그의 시체는 무더운 낮에도 추운 밤에도, 바깥에 버려져 뒹굴 것이다. 나는 이렇게, 여호야김과 그의 자손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에게도, 그들이 저지른 죄를 벌하겠다. 그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 내가 경고하였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내가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28~31 새번역)

//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시는 분이 계신다. 바로 주님이시다. 주님은 여호야김 왕에게는 말씀의 빛을 가리셨다. 음~ 여호야김이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버렸다고 해야하나.

// 예레미야와 바룩을 숨기신 분도 주님이시다.

// 평안의 예언이 아니라 재앙의 예언에 이 시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예레미야 36:1-19

다시 여호야김때로.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요시야 왕 때부터 여호야김 때까지 예언했던 모든 말을 두루마리 책에다 기록하라고 명하신다. 기록의 목적은 분명하다. 유다 가문이 (재앙의) 예언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주님이 유다 가문의 악과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의 통로다. 복음이다.

예레미야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불러 주님의 말씀을 대필하게 했다. 그리고 바룩에게 성전에 들어가서 두루마리 책에 대필한 주님의 말씀을 금식일에 백성의 귀에 낭독하라고 부탁했다. 예레미야는 백성이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며 (주님을 노엽게 하고 진노하게 한 )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을 기대했을까?

바룩은 예레미야가 명령한 대로 성전에서 두루마리에 적어 온 주님의 모든 말씀을 낭독했다. 유다백성들은 이날 금식을 선포했고 바룩은 성전에서 두루마리에 적어온 예레미야의 (재앙의) 예언을 모든 백성에게 낭독했다.

사반의 손자요 그마랴의 아들인 미가야도 바룩의 낭독을 들었다. 그는 왕궁에 가서 고관들에게 자신이 들을 예언의 말을 전했다. 이에 고관들은 바룩에게 두루마리 책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왕궁에서 다시 낭독하게 했다. 그들은 바룩의 낭독에 놀라 왕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한편 그들은 이 재앙의 예언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궁금해 했고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주는대로 기록했다고 답을 했다. 고관들은 바룩에게 돌아가서 예레미야와 함께 숨어 있으라고 말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게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 5:14-16 공동번역)”]

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구절이 떠올랐을까? 고관들은 바룩과 예레미야을 숨겨주기보다 함께 재앙의 예언을 낭독하며 다녀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낼 본문을 당겨보니… ㅋㅋ

예레미야 35

유다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때 이야기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레갑사람들을 불러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레갑사람들을 후손 하바시냐의 손자, 예레미야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그의 형제와 그의 모든 아들과 모든 레갑 사람들의 후손을 데리고 성전에 있는 하나니므이 사람 하난의 아들의 방에 가서 포도주를 마시라고 권했다.

레갑 후손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선조 요나답이 후손들에게 한 명령, 즉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화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댔다. (아주 자랑스럽게)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다고 대답했다.

레갑 후손들이 예루살렘에 머무는 이유는 국제정세의 혼란가운데 피난처로 예루살렘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주님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이유는 불순종의 유다 백성들을 교훈하기 위해서였다. 레갑 후손들의 순종을 배우라는 것이다. 레갑의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가 그들에게 명령한 그 명령을 지켜 행하는데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불순종의 백성들에게 재앙은 선포하신다. 그리고 선조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행한 레갑의 아들 요나답 후손들에게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한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후손들이 누린 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이 성결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다. (약4:8)  시편기자도 내가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합니다.(시 119:113)라고 노래한다.

// 사족1: 인생 길을 운전할 때 술김에 운전을 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주님의 네비게이션에 순종하라고 하신다. 무엇보다도 주어진 법규를 따라 운전하라고 하신다.

// 사족 2: 이스라엘 혈통이 아니라 레갑족속도 영원히 하나님 앞에 서는 복을 받았다. 생각하는 바가 많다.

레갑 가문의 가훈은 인생의 음주 운전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명령한 이 가훈을 후손들은 삼백년 가까이 지켜왔다. 국제정세를 피해 임시 정착한 예루살렘 성에서도 지켰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인생길을 운전함에 있어 술취하지 말아야 한다. 술취하면 음주운전을 하는 꼴이다. 대신 말씀의 네비게이션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충만의 바탕이다.

#레갑

예레미야 34:8-22

주님의 마음을 돌이키자. 시드기야 왕과 유다 백성들이 가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바벨론에 에워쌓임을 당한 이유를 정의와 공의 짓밟았기 때문이라고 주님이 끊임없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들은 정의와 공의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자 동족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로 했다는 뜻일 것이다. 주님은 동족 노예를 풀어주는 것은 율법에 따라 마땅한 행동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쩌랴. 마음에 없는 순종의 모먕으로 어찌 주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으랴. 마음에 없는 순종의 모양은 능력이 없다. 당연히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얼마지나지 않아 노예를 풀어주는 행위가 아무런 효험이 없자 그들은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노비로 삼았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다시 히브리 노예에 관한 율법을 상기시켜 주신다. 그리고 선조때부터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고 지적하신다.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계약은 주님앞에 마땅하고 바른 일이었는데 너희가 돌이켜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노비로 삼았다고 책망하신다.

주님은 동족 노예를 자유케 하지 않은 백성들에게 대신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칼과 전염병과 기근이 유다 백성들을 대적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칼과 전염병과 기근으로 유다 백성들이 세계 여러나라에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이 모든 것은 유다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 결과다. 유다의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드기야 왕부터 모든 백성까지 바벨론에게 넘기신다고 하신다. 유다 성읍들을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정의와 공의는 주님을 사랑하는 어쩌면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들은 정의와 공의의 모양만 있고  정의와 공의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다.

//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2~5)]

//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지 않으면 교회도 황무지가 될지도 모른다.

예레미야 34:1-7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에워 싼 대적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라고 기록한다. 한마다로 세상 모든 나라와 세상 모든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 “내가 이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 불순종 한 백성들의 운명이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유다 시드기야 왕이라고 해서 그 운명이 다르지 않다고 하신다. 칼에 죽지 않고 평안히 죽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제 예루살렘 주위에는 라기스와 아세가 두 성읍만 남고 다 바벨론에 함락되었다.

// 세상 모든 나라와 세상 모든 사람이 불순종한 교회를 애워싸고 있다. 순종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데 어쩌면 칼에 죽지 않고 평안히 죽겠다고 여전히 불순종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이다. 두 성읍이라도 남아있을 때가 순종을 의미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