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라고 복음서를 시작한 요한은 첫번째 편지에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다. (생명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은 성도들이 (이미) 듣고 보고 살펴보고 심지어 만져보기까지 한 인격체라고 소개한다.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음은 말씀이 육신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심이다. 영원한 생명은 결국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 영생이다. 이 영원한 생명,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성도들 간에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교제하셨고 하시고 앞으로도 하시듯이 성도들도 예수님과 교제함으로 성부하나님과 교제하고 성도들간에도 (영원한)사귐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이 사귐이 성도들의 기쁨이다.

생명의 말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은 빛이셔서 하나님께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하나님에 대하여 감출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이것은 ‘소위’ 성도들이 말로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한 경고다. 어둠에 행한다는 것은 불순종이다. 불순종하면서 순종하는 척 하는것은 거짓이요 진리가 아니다. 빛가운데 행하면 주님은 우리를 아신다. 불순종 하는지 순종하면서도 연약한지. 하나님과의 사귐과 성도들 간의 사귐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한다. 예수님께서 순종하려는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주신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중보자로 세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자신의 순종이 온전하다고 말하면, 다시말해 중보자 없이도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죄를,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끊임없이 자백해야 한다.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 중보자 주님을 요청해야 한다. 주님은 미쁘시다. 신실하시다. 의로우시다. 우리의 죄, 연약한 부분을 담당해 주신다. 그래서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길 수 있는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신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자다.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셨다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주장한다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주님, 예수님이 더 이상 필요없다고 하는 것이니 예수님을 자신과 성도들 사이의 중보자로 친히 세우신 하나님을 거짓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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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 우리 가정 소식지의 제목이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다. 요한1서는 생명의 말씀이 죄인인 우리에게 친구하자고 오셨다고 말한다. 사귀자고 하신다. 성도들은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살펴보고 심지어 악수까지 해 본 사람들이다. 거기가 끝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부터 사귀자는 프로포즈를 받은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사귀신다. 성자 예수님과 사귐이 있는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사귈 수 있게 된다. 만약 성자 예수님과 사귐이 없다면 성부 하나님과의 사귐도 없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있는 유일한 중보자가 성자 예수님이식 때문이다. (사귐은 나와 삼위하나님 사이뿐만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도 있어야 한다.)

그러니 성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중보자이신 성자 예수님이 필요없다고 하면, 우리가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이것은 거짓이요 진리이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옷으로 (예수님과 교제로) 우리의 죄를 가려야 한다. 예수의 피로 죄씻음을 받아야 한다.

성도들이 성자 예수님과 사귈 수 있는 이유는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루셨기 때문이다. 요한은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빛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다. 빛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중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대로 어둠에 행한다는 것은, 죄를 범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중보가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중보자로 세우셨다. 예수님을 필요없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은 우리 속에서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는다.

예레미야를 마치고 요한일서다. 요한일서도 ‘임마누엘’을 이어받는다. 주님이 함께 하심이 사귐이다. 이 사귐은 우리에게 빛가운데 행하면이라는 조건을 제시한다. 주님은 순종하는 자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