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5:1-12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다. 다시말해 성부 하나님은 성도들의 아버지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형제들을 사랑한다. 형제들을 사랑(해야)하는 이유는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아버지의 명령(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결코) 무겁지 않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면 형제 사랑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해할 수도, 줄 수도 없는 사랑이다. 이것은 믿음이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 세상을 이긴다. 예수님이 이미 이기셨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세상은 사망이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세례받으실 때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도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진리이신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심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까지 진리를 거스리지 않으셨다고 성령이 증거하신다. 하나님께서 증언해 주신다.

성도들은 이 하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불신은 하나님의 증언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성자 예수님과 사귐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성자 예수님과 사귐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생명이 오직 주 예수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4:11-2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한복음 삼장 십육절”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와 오늘 본문 11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가 서로 댓구다. 요한은 계속해서 믿음은 영생이요 영생의 증거는 (형제)사랑이라고 재삼강조한다.

요한은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다시 말한다. 이 사귐을 사랑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결국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이께서 부어주신 온전한 사랑이다. 성부가 성자를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도 사랑이요, 성자가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사랑이다. 성령으로 성부 성자를 시인하는 사람이, 이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귀는 성도다. 요한은 하나님과 사랑을 동일시 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사랑 안에 거하는 자 안에 거하신다.

이 사랑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따라서 심판 날에 담대할 수 있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도 담대하셨던 이유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할 수 있는 (담대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요16:33)

우리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까지 주신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본을 알고 있다. 그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였다. 이 사랑을 받은 자라면, 이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어떻게.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 당연한 것을 주님은 계명으로 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라.

요한일서 4:1-10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의 영을 알아라’라고 당부한다. 성부하나님을 알고 성자 예수님을 알고 성령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의 영,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성육신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요한의 결론은 간단하다. 하나님께 속한 영은 예수를 시인하고, 예수를 시인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속한 영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한다.

요한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속하였고, 즉 하나님과 교제하고 세상에 속한 영들을 이겼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삼위 하나님께서 세상 권세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적그리스도의 영에게 혹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위로해 주셨다.(요16:33)

성자 예수님이 혼자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심을 말씀하시며 위 말씀을 하셨다. 삼위 하나님이 사귀듯이 성도들도 예수 안에서 사귐을 누린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즉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 가치를 따른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나님께 속해 하나님을 아는 자, 즉 영생을 가진 자들은 진리의 영을, 세상에 속해 하나님을 모르는 자, 즉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자는 미혹의 영을 가졌다.

요한은 다시한번 하나님께 속한자, 진리의 영를 가진 성도들의 특징을 (형제)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영을 가진 성도는 당연히 (형제를) 사랑하는 자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사귀는 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가장 큰 사랑이다. 성부 하나님은 독생자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성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히 친구라고 부르시고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버리시며 자신의 말씀을 실천하셨다.

사랑은 이것이다. 가장 큰 사랑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큰 사랑을 우리도 형제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2,13)

예수님과 사귐이 있는가? 예수님의 친구인가? 그럼 형제를 사랑하는가? 계명(말씀)대로 행하는가?

요한일서 3:13-24

형제들아! 세상이 너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신다. 세상이 형제사랑을 하지 않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뜻일게다. 오히려 형제사랑을 ‘의’의 시금석으로 삼는 성도들을 박해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한 술 더 뜬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한국에서 생명의 다리를 그리며 복음을 전한 적이 있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다리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십자가였다.) 오늘 요한은 그 다리자리에 형제사랑을 놓았다.

요한은 복음서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로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증언한다. 이 말씀을 보혜사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고 적용하게 하신 말씀이 오늘 14절이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하셨다.(요15:12,13)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 친치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가장 큰 사랑을 하셨다. 성도들은 이 사랑을 알고 마땅히 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요한은 이 사랑이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권면한다. 형제사랑이야 말로 진리에 속했다는 확실한 증거다. 주님앞에 굳세게 서는 확실한 방법이다.

요한은 주님의 계명을 이렇게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형제사랑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께서 이렇게 깨닫게 해주신다.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할 사귐의 핵심이다. 믿음이 곧 형제사랑이다.

요한일서 3:1-12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세상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우리의 성부이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지금은 온전히 실감할 수 없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주님과 같을 줄 아는 소망만 있을 뿐이다. 주님과 같이 성부하나님과의 온전한 사귐을 소망하는 자는 주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자신도 깨끗하게 해야한다.

죄를 짓는 자는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사귐을 깨뜨리는 것이다. 주님이 이땅에 오셨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 죄를 없애려고 오셨다. 주님에게는 죄가 거할 수 없다. 따라서 주님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지을 수 없다. 죄를 짓는 자는 주님을 보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한 자들이다.

요한은 다시한번 성도들에게 미혹당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의를 행하라고 한다. 주님의 의로우심 같이 의로우라고 한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고 경고한다. 성자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 마귀를 멸하려고 오셨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가 (성자 예수님이) 그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성자 예수님과의 사귐이 있기 때문이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부터 오셨기 때문에 죄가 없으시다. 범죄하지 못하신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의를 행하는지 아닌지로 구별된다. 요한은 의를 행하는지 아닌지의 시금석으로 다시한번 형제사랑을 언급한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다. 계명의 우선순위 영순위다. 요한은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예를 든다.

// 형제 사랑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하는 시금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