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2:12-29

// 사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됨이다. 부부관계가 대표적이다.

요한은 자녀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알려준다. 주님이 사귐의 손을 내미신 것이다. 아비들에게는 너희가 창조주를 안다고 확인시켜준다. 사귐의 손을 내미신 주님은 창조주이시다. 청년들에게는 악한 자를 이었다고 손들어 주신다. 요한은 14절에서도 13절을 반복한다. 자녀들(아이들)에게는 죄를 용서 받음이 하늘 아버지로 부터임을 알려준다. 아비들에게는 다시한번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하신다. 청년들에게는 흉악한 자를 이긴 것은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바로 생명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기 때문이라고 알려준다. 그들의 강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자녀, 아비, 청년은 각각 다른 연령대의 사람일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라는 성도 한명 한명이기도 하다.

사귐은 결국 주님안에서 우리 신앙의 성장이다. 요한은 이 사귐을 방해하는 것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을 사랑하면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은 세상 것과 함께 하실 수 없으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과 사귈 수 없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영생이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영원히 사귄다.

요한의 경고는 영원하지 않고 지나갈 세상에 대한 경고를 한다. 그들은 주님을 떠났다. 주님의 말씀을 떠났다. 주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을 떠났다.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대신 세상의 가르침, 거짓 진리를 조심하라고 한다.

거짓진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곧 성부 하나님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으신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나님으로 시인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거하신다. 임마누엘이며 사귐이 있다.

요한은 복음의 첫 가르침이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반복한다. 삼위 하나님 안에 거하라. 삼위 하나님 안에서 삼위 하나님을 알아가며 사귀는 것이 약속하신 복음이요 영생이다.

그런데 미혹하는 자들이 있다. 다른 것을 가르친다. 보혜사 성령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는대로 주님 안에 거하면 되는데 미혹하는 자들이 있어서 경고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고 한다. 미혹을 벗어나거나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주님을 친구 삼아 사귀는 것이다. 주님을 친구 삼아 인생길을 간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꺼리낌이 없을 것이다.

의로우신 주님과 함께 길을 간다면 당연히 의를 행해야 한다. 의를 행하는 자는 주님과의 사귐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2:1-11

// 성경은 특히 신약은 짧은 본문에도 묵상할 것이 너무 많아 모든 구절을 다 살펴보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는 요한일서를 사귐이라는 주제로 묵상하기로 했다.

요한일서의 목적은 성도들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범하면 거룩하신 성부하나님과 사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여나 범죄해도 성부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하도록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와 성도들 사이에 중보자로, 대언자로 보내 주셨다.(예수님은 성도들뿐 아니라 온세상의 죄를 위해 중보자로 오셨다.)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이 영생이라고 했다. 영생은 하나님과 주님을 아는 것이다.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아는 증거라고 말한다. 만약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한다. 거짓말하는 자에게는 주님이 거하실 수 없다. 진리가 그곳에 없다고 한다.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 안에 주님이 (주님의 사랑이) 계시고,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주님 안에 거한다고 요한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사귐은 주님이 우리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 증거가 주님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 시금석이 형제 사랑이다!

(나의 자녀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부모와 자녀간에 사귐이 있듯, 연인들 사이에 사귐이 있듯 요한은 수신자들을 부른다.)

주님을 따라 행하는 것, 빛가운데 행하는 것의 첫번째가 형제 사랑이다. 주님과의 사귐이 있는 자는 형제를 사랑한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여전히 어둠에 있다. 다시말해 삼위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 어둠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어떻게 사귀어야 할 지 모른다. 짝사랑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눈이 멀어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할 수 없다.

힘써 삼위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요한1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라고 복음서를 시작한 요한은 첫번째 편지에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다. (생명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은 성도들이 (이미) 듣고 보고 살펴보고 심지어 만져보기까지 한 인격체라고 소개한다.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음은 말씀이 육신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심이다. 영원한 생명은 결국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 영생이다. 이 영원한 생명,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성도들 간에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교제하셨고 하시고 앞으로도 하시듯이 성도들도 예수님과 교제함으로 성부하나님과 교제하고 성도들간에도 (영원한)사귐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이 사귐이 성도들의 기쁨이다.

생명의 말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은 빛이셔서 하나님께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하나님에 대하여 감출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이것은 ‘소위’ 성도들이 말로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한 경고다. 어둠에 행한다는 것은 불순종이다. 불순종하면서 순종하는 척 하는것은 거짓이요 진리가 아니다. 빛가운데 행하면 주님은 우리를 아신다. 불순종 하는지 순종하면서도 연약한지. 하나님과의 사귐과 성도들 간의 사귐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한다. 예수님께서 순종하려는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주신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중보자로 세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자신의 순종이 온전하다고 말하면, 다시말해 중보자 없이도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죄를,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끊임없이 자백해야 한다.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 중보자 주님을 요청해야 한다. 주님은 미쁘시다. 신실하시다. 의로우시다. 우리의 죄, 연약한 부분을 담당해 주신다. 그래서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길 수 있는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신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자다.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셨다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주장한다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주님, 예수님이 더 이상 필요없다고 하는 것이니 예수님을 자신과 성도들 사이의 중보자로 친히 세우신 하나님을 거짓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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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 우리 가정 소식지의 제목이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다. 요한1서는 생명의 말씀이 죄인인 우리에게 친구하자고 오셨다고 말한다. 사귀자고 하신다. 성도들은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살펴보고 심지어 악수까지 해 본 사람들이다. 거기가 끝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부터 사귀자는 프로포즈를 받은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사귀신다. 성자 예수님과 사귐이 있는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사귈 수 있게 된다. 만약 성자 예수님과 사귐이 없다면 성부 하나님과의 사귐도 없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있는 유일한 중보자가 성자 예수님이식 때문이다. (사귐은 나와 삼위하나님 사이뿐만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도 있어야 한다.)

그러니 성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중보자이신 성자 예수님이 필요없다고 하면, 우리가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이것은 거짓이요 진리이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옷으로 (예수님과 교제로) 우리의 죄를 가려야 한다. 예수의 피로 죄씻음을 받아야 한다.

성도들이 성자 예수님과 사귈 수 있는 이유는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루셨기 때문이다. 요한은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빛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다. 빛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중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대로 어둠에 행한다는 것은, 죄를 범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중보가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중보자로 세우셨다. 예수님을 필요없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은 우리 속에서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는다.

예레미야를 마치고 요한일서다. 요한일서도 ‘임마누엘’을 이어받는다. 주님이 함께 하심이 사귐이다. 이 사귐은 우리에게 빛가운데 행하면이라는 조건을 제시한다. 주님은 순종하는 자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52:12-34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사령관 느부사라단을 보내 뒷정리를 시켰다.

1. 성전과 왕궁과 중요 건물들을 불살랐다. 예루사렘 성벽도 헐어버렸다.

2. 항복한 자들을 (이들은 주화파였으리라) 포로로 잡아갔다.

3. 가난한 자들을 남겨 두어 폐허가 된 유다의 포도원 관리자와 농부로 삼았다.

4. 성전의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5. 척화파들은 사로잡아 모두 쳐 죽였다.

주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이 어김없이 성취되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외쳤건만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고. 항복한 자들은 살아서 포로로 잡혀갔다. 성전의 모든 기구들은 빼앗겼으며, 바벨론에 대항해 싸운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바벨론 사령관이 뒷정리하면서 대제사장, 부제사장 성전문지기 세사람을 사로잡았다는 대목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척화파에 앞장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종교적 아집이 불순종으로 저들을 내몰았을 것이다.

시편기자는 84편에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노래한다.” 그런데 척화파 종교지도자들은 참된 주의 궁전과 성전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을 잊었다. 임마누엘의 주님은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서는 여호야긴왕이 감옥에서 풀려나는 이야기로 끝맺는다. 포로생활 37년만에 풀려난다. 70년 포로기간을 따지면 반환점을 돈 후에야 풀려난 것이다. 포로로 잡혀 온 주화파들은 그제사 포로귀환에 대한 꿈을 다시 꾸기시작했을 것이다. 여호야긴 이야기에도 곱씹어야 할 표현이 있다. 여호야긴은 일용할 양식을 바벨론 왕에게서 받았다. 정량으로 종신토록 받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양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살면서 일하면서 얻는다.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정량으로 종신토록 채워주실 것이다. 그러나 쌓아두려고 해서는 안된다. 바벨론 왕도 여호야긴에게 종신토록 먹고도 남을만큼의 부를 한꺼번에 주지 않았다. 날마다 쓸 것을 정해 주었다. (내일을 위해 쌓아두는 것은 세상에서도 탐욕이리라. 세상 왕의 지혜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니 남는 것이 있으면 모자라는 사람들을 위해 내어 주어야 한다.

예레미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이다. 힘들게 달려왔다. 재앙의 예언. 주님은 끊임없이 재앙의 예언을 말씀하셨다. 그 이면에는 순종하라는 명령이 들어있었다. 불순종이 곧 재앙이기 때문이다. 재앙의 말씀 가운데 간간히 주신 복음이 바로 ‘임마누엘’이다. 세상에 다른 복음은 없다. 주님은 순종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예레미야 52:1-11

에필로그는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 개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주님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이었다. 주님이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진노하셔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바벨론 손에 넘겨주신 이유다.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시드기야는 당연히 주님이 선도부로 세우신 바벨론을 배반한다. 척화파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예루살렘도 성전도 시드기야의 피난처가 될 수 없었다. 진정한 피난처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포위로 예루살렘 성은 피난처가 아니라 감옥으로 변했다. 결국 안으로는 성안의 양식이 떨어지고 밖으로는 바벨론이 성벽을 파괴했다.

시드기야는 성을 버리고 도망하지만 바벨론 군에 잡혀 바벨론 왕 앞에 선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데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후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다.

예레미야서 기자는 왜 시드기야의 이야기로 에필로그를 시작할까? 시드기야에게는 주화파 예레미야의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다. 선도부 바벨론 왕을 배반하지 말아야 했다. 더군다나 포위당한 기간이 1년 반이나 되었다. 이 기간동안이라도 주화파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야 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가두었지만 자신이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에 갇혔다는 것을 몰랐다. 마지막으로 시드기야는 사로잡혀 바벨론 왕 앞에 섰다. 주화파의 조언에 따라 항복을 해야하는데 눈을 부릅뜨고 배반의 말을 반복하지 않았을까? 결국 장님이 되어 죽는 날까지 바벨론에서 옥살이 했다. 주님의 말씀을 주화파의 생각으로만 치부하고 순종대신 척화파의 편에 선 시드기야의 삶의 결국은 유다의 종말을 대변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갇혀 사는 이유도 주화파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보지 못하고 세상과의 타협으로만 보기 때문은 아닐까?

바울은 권면한다.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고. 심지어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악에게 지지 않으려고 악으로 악을 이기려고 몸부림친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미 진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나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또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