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51:1-10

주님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부추기신다. 바벨론을 치고 또 나를 대적하는 자 중에 있는 자를 치신다고 한다. 결국은 바벨론도 주님을 대적하는 자 중에 있다는 뜻이다. 주님은 다른 나라를 세워 바벨론을 키질 하시겠다고 하신다. 뭔가 남는게 있으려니 하지만 바벨론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온나라를 키질하여 말끔히 쓸어내겠다고 하신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바벨론. 시편 1편 기자는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을 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노래한다 (새번역). 바벨론이 그꼴이다.

바벨론의 패망중에 주님은 또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복음을 심어놓으신다. 이스라엘과 유다도 주님을 거역하(였)고 바벨론 땅에 포로잡혀와서도 죄가 가득하나 주님이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죽음으로 갈라서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다시말하면 주님이 남길 자를 남기신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바벨론에서 탈출하라고 하신다. 함께 벌받지 말라고 하신다. 음. 바벨론의 가치를 따르지 말라는 뜻이 강하다. 주님께서는 바벨론에게 행한대로 갚으실 때가 되었다고 하신다. 그러니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긴자에도 행한대로 갚으실 때가 올 것이니, 잘못된 행위에서 뛰쳐나와 진멸의 심판을 면하라고 소망을 주시는 것이다.

바벨론은 주님의 금술잔이었다. 주님이 주님의 백성을 벌하시는 도구였다. 선도부였다. 그러나 행한대로 갚으신다는 주님의 교훈은 간 곳 없고 자신의 힘만 자랑했다. 그러자 세상도 힘자랑에 취해버렸다.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다르다. 월드컵에서 독일이 대한민국에게 2:0으로 영패하는 것보다 더 확률이 낮지만, 지금의 미국이 망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바벨론은 갑자기 망해 무너질 것이다. (약육강식이 정의와 공의와 자비의 가치를 이길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은 어김이 없다. 오호 통재라, 바벨론은 통곡할 수 밖에 없다. 회복불능이라고 하신다. 약육강식이라는 교만병에 걸린 바벨론은 그 죄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에 주님의 재앙도 하늘부터 내려온다.

바벨론의 멸망을 주님의 공의를 드러낸 사건이라고 한다. 따라서 시온에서 우리 주님의 일, 즉 주님의 공의가 무엇인지 선포하자고 예레미야는 노래 한다. 우리도 공의를 노래해야 한다.

// 바벨론에서 도망쳐 바벨론과 함께 벌받지 말라고 하신다. 도망치라는 명령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피난가라는 것이 아니다. 바벨론의 가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 가치에서 도망쳐야 한다. 예를 들어 자녀교육을 위해 한국을 떠난 가족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민간 곳에서도 아이들을 학원으로 돌린다면 무슨 소용인가? 바람에 나는 겨나, 요동치는 물결이나 두 마음을 품어서 그렇다. 주님도 따라야하고 세상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아니 일의 결국을 알고도 두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주님으로 우리 마음을 정해야 흔들리지 않는다. 그대 세상의 선도부를 한번 해보려나? 주님은 행한대로 갚으신다.

 

 

예레미야 50:33-46

주님은 바벨론의 패망은 어김없다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학대 받는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을 언급하신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의 패망의 이유가 된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패망한 이유가, 즉 이스라엘과 유다가 행한 불순종의 핵심이 백성가운데 있는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를 정의와 공의로 돌보지 않음이었다.) 주님은 마찬가지 이유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과 유다를 정의와 공의로 대하지 않고 학대한 바벨론을 벌하신다.

그래서 바벨론의 패망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는 소망이 된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들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강한 구원자가 되어 주님의 백성에게는 평안을 바벨론 주민에게는 불안을 주신다.

바벨론 패망에 대한 말씀이 이어진다. 정의와 공의 대신 학대를 휘두를 바벨론은 칼로 망한다. 바벨론의 지혜도 주님의 정의와 공의를 배우고 실천하지 못하면 어리석게 된다. 바벨론의 용맹도 주님이 사용하시지 않으시면 망치로 제 손을 치고 만다. 제국을 확장한 군대도 전투력을 상실할 것이고 바벨론의 부도 약탈될 것이다. 풍요롭던 땅도 가뭄에 메마를 것이다. 바벨론이 세운 우상들에 미친듯이 매달려 보겠지만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가 될 것이다. 주님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만들 것이다.

바벨론이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어도 정의와 공의와 자비의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면 또 다른 심판자를 일으키신다. 바벨론보다 더 잔인한 심판자라고 하신다. 바벨론은 소문만으로도 마음이 녹을 것이라고 하신다. 새로운 나라로 바벨론을 치는 것은 주님의 계획이시다. 어김이 없다. 바벨론의 패망은 온세상이 알게 될 것이다.

// 우리 주님은 강한 구원자시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학대가운데 구원하신다. 정의와 공의와 자비의 사랑이 없는 곳에서 구원하신다. 하나님나라는 정의와 공의와 자비의 사랑이 나눠지는 곳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부르짖어야 (기도해야) 한다. 강한 구원자가 들으신다. 우리는 기꺼이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맛보는 삶이다.

예레미야 50:21-32

주구장천 바벨론의 패망에 대해 말씀하신다. 바벨론은 패(망)하여 폐망할 것이다. 온 세계의 망치로 승승장구하던 바벨론이 어찌 꺾였을까? 주님이 교만이라는 올무를 놓았는데 바벨론이 걸려들었다고 주님은 말씀한다. 올무에 걸렸으면 살려달라고 빌었어야 했는데 몸부림치다가 오히려 올무에 갇히고 말았다. 이렇게 주님은 다른 심판자를 일으키시어 바벨론을 진멸하실 것이다. 바벨론도 벌 받을 때가 되었다고 하신다.

바벨론이 패망할 때는 바벨론에서 시온으로 도망치는 날이다. 주님께로 돌아가는 날이다. 주님이 하시는 심판에서 교훈받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을 선포해야 한다. 주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시다.

바벨론의 행한 일을 주님을 향한 교만이라는 단 한 단어로 설명한다. 주님을 대적하는 교만. 바벨론은 교만으로 멸절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교만이 치달으면 주님의 벌을 받을 때가 된 것이다.

결국 올무에 걸리는 자는 교만한 자다. 교만한 자를 일으킬 자는 없다. 주님은 교만을 불살라 진멸하신다. 바벨론의 운명이다.

// 사자와 생쥐라는 이솝우화가 기억난다. 올무에 걸렸으면 사자라도 생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올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다. 하물며 주님이 쳐놓은 교만이라는 올무에 걸렸다면 겸손해져야 하는데 바벨론은 오히려 주님의 경고를 무시했다. 주님께 대들었다. 망치질을 하려면 조심해야 하는데, 까불다 자신의 손가락을 때린 꼴이다. 온세계의 망치였던 바벨론은 이렇게 교만하다 꺾였다.

야고보는 정욕에 따라 세상과 벗됨을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한 단어로 말하면 결국은 교만이다.

주님을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4:6)

예레미야 50:1-20

바벨론과 갈대아 사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다. 역시 바벨론에 대한 재앙의 예언이다. 바벨론이 함락되고 바벨론의 우상들은 부서질 것이라고 하신다. 바벨론보다 더 북쪽의 한 민족이 바벨론을 사람도 짐승마저도 살지 못하는 폐허로 만들것이라고 하신다.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와 주님을 찾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즉 어김이 없다.)

바벨론의 폐망은 이스라엘에게는 소망이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시온으로 돌아오면서 ‘영원한 언약’을 지킬 것을 서로서로 다짐할 것이다. 지도자를 잘못 만나 포로되었었다. 열방도 다 알듯이 이스라엘이 주님께 범죄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바벨론을 탈출하라고 하신다. 바벨론의 시대른 저물었다. 이제는 바벨론이 약탈당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니 어김이 없다.

(1-10)

바벨론은 심판의 도구였다. 주님이 주님의 백성을 벌하기 위해 사용하셨다. 그런데 바벨론은 자신의 힘인양 교만하여 즐거워하고 기뻐 날뛰었다. 이제 대국 (어미) 바벨론도 수치를 당할 것이다. 나라들 중에 가장 낮은 나라가 될 것이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모든 재앙이 심판의 도구 바벨론에게 임한 것도 주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국은 망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신다. 바벨론에게 사로잡혔던 자들에게는 고향으로 도망칠 기회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교훈하신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패망시켰다. 그 앗수를 바벨론이 함락시켰다. 이제 바벨론도 벌을 받을 것이다. (한마디로 앗수르나 바벨론이 강해서 이스라엘이 유다가 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대신 이스라엘과 유다와 포로지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주님은 그날에 이스라엘과 유다에게서 죄를 찾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은 주님께서 남긴 자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11-20)

 

// 주님의 백성이라고 먼저 되었다고 생각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해 나중 되었다. 그런데 앗수르도 바벨론도 먼저 되었다고 교만하자 주님은 그들을 나중 되게 하신다. 그리고 주님이 (나중 되었던 이스라엘 중) 남기신 자들을 먼저 되게 하신다. 죄없다 하신다. 용서하신 것이다. 복음이다.

예레미야 49:23-39

다메섹과 게달과 하솔 그리고 엘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다. 예언적으로 기록되어있지만 시간상 분명히 주님의 역사해석이다. 주님의 역사해석은 분명하다. 사람의 자랑과 부유함과 힘은 결국 망한다는 것이다.

다메섹도 패망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주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찬송과 즐거움을 자랑했어도 자화자찬과 자기만족은 불타버리고 말 것들이다.

게달과 하솔도 마찬가지다. 부유함으로고요하고 평안히 산다해도 주님은 바벨론 왕을 통해 그들을 칠 모략과 계책을 세우시고 멸망시키셨다. 주님이 하신 일이다.

엘람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자신의 힘을 의지한다해도 주님이 그 활을 꺾으셨다. 엘람도 주님이 멸망시키셨다.

// 재앙과 멸망의 역사해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주님은 복음을 맛보게 한다. 엘람의 포로를 돌아가게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주님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