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23-34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건너편으로 가는 배를 타시자 제자들이 따랐다. 뱃길 중에 배가 물결에 휩싸일 정도로 큰 풍랑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 중 평생 어부로 살아왔던 이들에게는 부모와 형제와 친척을 앗아간 풍랑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제자들에게 왜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작은자들아 (책망)하셨다. 예수님은 종종 믿음이 큰 자 믿음이 작은 자라는 표현을 쓰셨다. 믿음이 큰 자는 믿음이 있는 자요, 믿음이 작은 자는 믿음이 없는 자에 가깝다. 즉 있고 없고의 의미가 강하다. 겨자씨만한 크기도 큰 믿음이다. 따라서 작다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산상에서의 가르침과 산에서 내려 오신후의 치유와 축귀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었다.

예수님은 풍랑을 일으키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 갈릴리는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제자들은, 제자들 말고도 사람이 탔을 수 있겠지만) 바람과 바다도 순종시키는 예수님께 놀랐다. 모든 만물이 주님께 복종한다.

건너편은 가다라 지방이었다. 가다라지방에는 귀신자들린 자가 (둘이, 마태는 둘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있었다. 귀신들린자가 사나워 아무도 그 길을 쉽게 지나갈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발을 들여놓으시자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께 나왔다.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의 권세를 이길 수 없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 굴복하고 돼지 떼에 들여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귀신들은 돼지에게로 들어갔고 돼지들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몰사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가다라 마을에 들어가 이 사건을 보고하자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그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간구했다.

예수님은 마을 사람들의 출입을 방해하는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셨다. 축귀당한 사람도 마을 사람도 귀신의 영향아래서 벗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돼지 사업이었다. 귀신의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돼지 사업의 몰락보다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귀신들이 하는 짓거리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대신 재물을 섬기게 한다. 하나님 대신 건강을 섬기게 한다. 가다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다.

귀신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대하여 죽은 자들이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소리지르던 귀신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우상을 숭배하다보면 우상을 닮아 가듯이 귀신의 지배를 받다보면 귀신을 닮아간다. 가다라 사람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발로 차버리고 말았다. 오호 통재라.

때가 이르기 전에 예수님과 상관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아신 바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8:14-22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서 종종 머무셨나보다.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손을 만져주셨다. 베드로의 장모는 그 즉시 열병이 나아 예수께 수종을 들었다. 예수님의 병고치는 사역은 사회적 소외자였던 나병환자와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에서 여자로 이어진다. 베드로가 장모를 모시고 살았다는 것에서 장모는 과부, 즉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알수 있다. 남녀칠세부동석만큼이나 남녀유별한 유대문화에서 예수님은 여인의 손을 만져 치유하셨다. 천국은 세상문화도 뛰어넘는다. 마태는 병고침의 치유에는 축귀, 귀신을 쫓아 내는 사역도 포함되어 있다고 적는다. 질병과 귀신들린 것은 우리의 연약함이다.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셨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치유와 축귀를 위해 이땅에 오신 것이 다가 아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시고 보여주시려고 오셨고 천국백성의 삶이 가르치러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가 원하는 치유와 축귀의 자리에서 물러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다.

제자들중에 서기관이 있었나보다. 이 서기관은 선생되신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겠다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이 고난의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좇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 다른 제자는 예수님께 아버지를 먼저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아마도 예수님의 사역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없는 사람들을 장사하라는 의미인 듯 한데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는 모르겠다. 이 제자는 육신의 아버지의 상속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제자는 하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다.

장모라는 단어는 신약에 몇번 나오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람을 가르키는 경우는 베드로의 장모가 유일하다. 베드로의 장모가 베드로 때문에 아프기 전부터 예수님을 수종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베드로의 장모이기 전에 예수님을 따르며 수종든 많은 여인들 중의 한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역발상을 한다면 베드로의 회심에 장모의 역할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예수님은 치유에도 주도권을 가지셨다. 나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려는 예수님의 뜻이다. 천국은 이런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국을 이땅에서도 맛보는 삶이 제자의 삶이다. 한 서기관의 고백처럼 내가 따르겠다고 결심한다고 따를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제자의 삶은 이 땅에서는 거처가 없는 삶이다. 예수 안에 거처를 삼는 삶이다. 또 다른 제자의 바람처럼 이땅에서 상속을 받고자 하는 삶도 아니다. 하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삶이다. 오히려 부모도 함께 하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도록 인도하는 삶이어야 한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는 길이다.

마태복음 8:1-13

마태는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 (4:23)” 수많은 무리가 따랐다고 기록한다. 산상수훈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의 구체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은 병고치는 구체적 사역을 처음으로 기록한다. 그 첫 대상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나병환자와 두번째가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이라는 점은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복음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아미 4장에서 천국복음이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지방, 즉 유대와 이방의 경계에서 시작되었다고 묵상했었다.)

첫 나병환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였다.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었을 것이나 사람의 뜻으로는 (사랑없는 문자적 율법의 해석으로는) 유대인 공동체에 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무리를 지나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은, 아니 그가 예수님 앞에 나아오도록 무리들이 그냥 두었다는 것 자체가 신비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나음이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렸음을 알았다. 자신의 간절함보다 예수님이 원하셔야 자신이 깨끗하게 됨을 알았다. 마태는 확실하게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신 일이라고 언급한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구하는 믿음을 나병환자의 병고침을 통하여서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만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다시 속할 수 있도록 율법에 따라 행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외도 치유하신 것이다. 천국은 단순히 치유의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천국 백성 공동체에 들어가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두번째 사건은 큰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큰 믿음은 나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을 구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심지어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의 간구를 들어주신다. 백부장이 예수님의 능력을 시험했을리 없다. 그의 큰 믿음은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자신의 하인을 낫게 하신다는 것만이 아니다. 이방인으로서 유대인 선생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사회적 소외자였던 나병환자가 무리를 뚫고 예수님을 만난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이신 예수님이 이방인인 자신을 만나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백부장이라는 지위로 강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잘 알고 한 행동이었다. 물론 가장 놀라운 것은 병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예수님은 덧붙이신다. 천국 백성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하신다. 천국 백성의 자손들이 오히려 어두운 데로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하신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가르친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 천국백성이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그러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천국백성의 후손은 될 지 몰라도 천국백성은 아니다. 속인주의가 아니라 속지주의에 가깝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해야 (하나님나라에서 살아야) 천국백성이다.

백부장의 믿음에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라고 응답하셨고 그 즉시 백부장의 하인은 나았다. 천국 백성의 믿음은 다른 사람의 병을 낫게 한다. 공동체를 건강하게 한다. 관심이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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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칭찬하신 백부장의 믿음은 무엇인가?
1. 이방인도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께 나아 올 수 있다는 믿음
2.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간구할 수 있다는 믿음
3. 모든 만물이 (심지어 병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믿음

예수님은 세가지 중 첫번째를 가장 귀히 여기시는 듯하다. 천국,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통치의 놀라움이다. 요한은 이것을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설명한다.

천국은 속인주의가 아니라 속지주의에 가깝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해야 (하나님나라에 살아야) 천국백성이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 천국백성이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그러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천국백성의 후손은 될 지 몰라도 천국백성은 아니다.

마태가 유대인들을 주 독자로 쓴 복음서에서 첫 병고침을 사회적 소외자인 나병환자와 백부장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더 놀랍다.

마태복음 7:13-29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문은 좁은 문이다. 우리는 도움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크고 넓은 문은 멸망의 문이다. 다수를 따르지 말고 한 분 아버지 하나님을 따르라고 가르치신다. 이 좁은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좁고 협착하여 들어가기 쉽지 않다. 들어가기가 쉽지 않으니 찾는 자가 적다.

그래서 거짓선지자들은 들어가기 쉬운 크고 넓은 문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속인다. 그러나 크고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크고 넓은 멸망의 문으로 들어가서는 생명을 열매 맺을 수는 없다. 열매를 보면 그들을 알 수 있다.

열매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크고 넓은 문은 거짓 선지자들이 만들어 놓은 문이다. 실상은 문이 아니라 문이 아닌 곳을 넘어가도 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거짓선지자들은 절도며 강도질 하는 자들이다. 말로는 주여 주여 부르지만 정작 저들 자신은 주님의 음성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저들이 주님의 음성을 알지 못하니 듣기는 들어도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이 구원을 받고 꼴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요 10)

거짓선지자들은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주님께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저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고 기도하고 금식한 자들이다.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자들이다.

크고 넓은 문을 만들어 놓고 양들을 절도질하고 강도질 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강조하신다. 예수님의 말씀,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들은 목자를 따른다. 듣기만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곁에 나온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있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았다. 가르침은 내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가르치느냐가 더 중요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저자특강이다. 율법을 저자의 의도대로 사랑으로 완성하셨다. 문자 놀음을 하는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다를 수 밖에 없다.

마태복음 7:1-12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심판자가 되지 말라는 뜻이다. 심판자는 오직 주님이시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 받을 것이요’와 연결된 가르침이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거나 헤아린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비판(심판)하시고 우리를 헤아릴 것이다.

비판하는 자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자들이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외모로 판단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중심을 보지 못하고 외모만 보는 것 자체가 외식이라고 주님은 지적하신다. 외모를 잣대로 삼는 것을 저들 눈 속에 있는 들보라고 하신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고 하시는 것이다. 자신의 들보를 천부 하나님께서 빼 주셨다는 것을, 즉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형제의 티도 빼줄 수 있다. 형제를 용서할 수 있다.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거룩한 것이 (의로운 행위, 울법) 도리어 상대방을 비판하고 헤아리는데 사용된다고 경고하신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천국백성의 삶은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하는 자 찾는 자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주어진다. 주님이 기도를 가르쳐주신 이유도 천국 백성의 삶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이 끊임없이 도와주셔야 가능하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에수님은 오늘도 반복하신다.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己所不欲勿施於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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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Jul/2019 내 눈안의 들보는 나의 잣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기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