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49-64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56)

오늘 시인은 “주의 법도를 지킨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노래한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논리를 남겼다. 철학자가 아니니 철학적 의미를 따질 순 없고 다만 데카르트가 존재를 사유 혹은 이성으로, 즉 사고의 영역으로 제한해버렸다는 느낌이라면 (철학자들이여 용서하시라!) 시인은 존재를 행위 혹은 삶으로 풀어버렸다.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주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주의 말씀이 존재의 이유요 소망의 이유라로 노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중이라도, 조롱을 받아도, 악인들로 말미암아 분노에 휩싸여도 주야로 주의 율례로 노래부르며 나그네 길을 간다.

시인의 존재 이유는 주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소유가 되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행위가 주의 증거를 행하지 않을 때마다 지체하지 않고 주의 증거를 향해 방향을 튼다. 신속하게 회개하고 돌이킨다.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들이 유혹해도 시인은 주의 법을 잊지 않는다. 자다가고 일어나 주의 법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을 친구삼아 주의 법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주를 경외하여 주의 법을 지키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감사의 제목인가?

시인은 노래한다.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다고, 주의 율례가 가르치는 내용이 주의 인자하심이다. 주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주의 인자하심을 이땅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존재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