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65-80

주님과의 언약은 주님이 주님의 종을 선대하시는 것이다. 주의 계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주님의 선하심에 의지하여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은 말씀에 대한 통찰력과 지식을 구할 수 밖에 없다.

시인은 심지어 고난마져도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임을 노래한다. 고난을 당하지 않았으면 주의 약속에서 빗나갔음을 몰랐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고난을 통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음을 알았으니 이제 다시 주의 말씀대로 걷겠다고 한다.

주님은 선하시다. 주님의 행위는 선하시다. 시인이 배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선하심이다. 세상이 주님 외에도 선한 것이 있다고 거짓으로 우리를 꾀어도 시인은 그럴수록 주님의 법들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세상은 (마음도 비만에 빠져) 탐욕도 선하다고 가르치나 시인은 절제의 다이어트를 가르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래서 고난마져도 유익이라고노래한다. 고난이야말로 탐욕에 빠지지 않게 하는 구명조끼다. 주의 법을 읊조리는 기쁨을 천천의 금은보다 좋다고 노래하는 이유다.

주님이 나의 소유자다. 나를 지으셨다. 주님의 계명들이 나의 설명서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은 시인이 주님이 지으신대로, 주님의 설명서대로 행하는 것을 기뻐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심판은 철저하게 행한대로 갚으신다. 그래서 의로우신 주님은, 주님의 선하심을 베푸시기 위해 고난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백성를 돌이키신다. 그러니 고난은 주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성실하심이다.

따라서 고난은 주의 인자하심을 드러내심이요, 시인에게는 위로가 된다. 고난은 주의 긍휼하심으로 주어진 것이요 시인을 살리는 방법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것을 깨닫게 하는 주의 법을 즐거워 한다.

세상은 주님 외에도 선한 것이 있다고 거짓교훈을 가르치나, 그들은 결국 수치를 당할 것이다. 주님의 인정하심을 받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실 것이다. 그러나 주의 법도를 읊조리며 묵상하는 시인은 의인들의 (주를 경외하는 자들의) 회중에 들어가게된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과 함께 주의 증거들을 선포하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간구한다. 심판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시는 것보다 더 큰 수치가 있을까?

형통보다 고난이 주님의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