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1-18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하늘 아버지께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의를 행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행해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면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의를 행하는 예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드셨다. 의인의 삶의 첫째로 구제를 언급하신 것이 놀랍지 않은가? 오늘날 성도들도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 돌보는 것을 삶의 우선순위에서 첫째에 두어야 함을 산상수훈에서도 확인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은 것이 구원이요 천국백성의 삶이다. 구제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금식을 해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다면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예수님은 경고 하신다. 상은 중복해서 지급되지 않는다. 두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구제도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은밀하게 구제해도 다 보고 아신다.

둘째 기도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다.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도 은밀하가게 기도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밀하게 기도해도 다 듣고 응답하신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지 기도를 친히 가르쳐 주셨다. 이방인들과 같이 지성이면 감천인줄 알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의 필요는 하늘 아버지가 다 아시기 때문에 구하는 기도를 하는 이방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의 기도는 천국이 가까이 오도록  요청하는 기도다. 천국 백성으로 살겠다는 다짐이다. 이땅에서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기도다. 천국 백성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천국백성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시험과 악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기도에서 강조하는 것이 용서다. 거의 강제성을 띤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 백성의 마땅한 삶을 살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더이상 천국 백성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은가? 하나님께 용서 받기전에 사람에게 용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은밀하지만 용서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한편으로 기도를 통해 용서할 힘을 공급받게 된다.

세번째는 금식이다. 금식역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면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예수님는 경고하신다. 금식은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늘 아버지를 뵙고자 하는 행동이다.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것임이요”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를 은밀한 중에 만나주신다. 하나님을 만난다고,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자들을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자들이다.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자들은 우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바람에 요동하는 물결과 같다. 야고보는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소망해야 한다. 이상 저상을 기웃거려서는 안된다.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 받을 상은 온전한 구원이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살아 계셔어 오늘도 나와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간구하신다. (히 7:25) 아멘

하나님께서 주실 상외에 우리가 사모할 것이 또 무엇이랴!

One thought on “마태복음 6:1-18”

  1. 이진복 20210418
    오늘 목사님의 설교말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첫 구절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give us today our daily bread)”가 본문이었다.

    이 말씀은 사실 다른 목사님들이 흔히 하시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설교, 즉, “그날 하루에 쓰기에 족한 물질적 필요만 욕심없이 구하는 것” 이상의 뜻이 있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일지가 궁금했었다.

    원래 해당 구절(마 6:11)을 라틴어 성경(Vulgate)에서 보면 “panem nostrum supersubstantialem da nobis hodie”라고 되어있다. Panem nostrum 은 우리가 먹을 양식(our bread) 뜻이고, da는 nobis와 합쳐서 우리에게 달라고 요청하는 것(give us)이며, hodie는 오늘(today)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 한글이나 영어 성경에서 “일용할(daily)”로 의역을 하고 있는 supersubstantialem 은 super (넘어서는)+substantialem (순수 물질적인)이라는 뜻이 그 본 뜻이다. 철학서적같은 것을 제외하면 잘 쓰이지도 않는 단어일 뿐더러, 쓴다 해도 “일용할(daily use)”이라는 뜻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아마 이 단어를 “일용할”로 해석하는 건 성경이 유일할 것이다. 정확하게 Daily 를 나타내는 라틴어 단어는 quotidianum 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고, 훨씬 더 널리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굳이 이 supersubstantialem (초 물질적인;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이라는 단어를 왜 썼을까? 오늘 목사님은 그 이유를 아래 말씀에서 찾으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1-33)”

    그 당시 서민들은 하루 벌어먹고 하루 살아가기도 힘들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채우실테니, 그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justice)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물질적인 것은 이에 더하여 채워지는 것이며, 사실 채워지지 않아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된다. 본질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이므로, 하나님을 내 안에 모셨다면 오늘 당장 세상을 떠나도 슬퍼할 것이 없고, 오늘의 하루가 내게 족하며, 내일의 하루는 무엇이 되었던 그 자체가 선물이 되는 것이다.

    Supersubstantialem. 단어가 통째로 빠져도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라는 문장을 구성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이 “철학적” 단어가 굳이 왜 들어가있을까에 대해 대학교 때부터 수십년 간 가져왔던 의문이 오늘에야 풀렸다. 속이 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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