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14-22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서 종종 머무셨나보다.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손을 만져주셨다. 베드로의 장모는 그 즉시 열병이 나아 예수께 수종을 들었다. 예수님의 병고치는 사역은 사회적 소외자였던 나병환자와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에서 여자로 이어진다. 베드로가 장모를 모시고 살았다는 것에서 장모는 과부, 즉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알수 있다. 남녀칠세부동석만큼이나 남녀유별한 유대문화에서 예수님은 여인의 손을 만져 치유하셨다. 천국은 세상문화도 뛰어넘는다. 마태는 병고침의 치유에는 축귀, 귀신을 쫓아 내는 사역도 포함되어 있다고 적는다. 질병과 귀신들린 것은 우리의 연약함이다.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셨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치유와 축귀를 위해 이땅에 오신 것이 다가 아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시고 보여주시려고 오셨고 천국백성의 삶이 가르치러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가 원하는 치유와 축귀의 자리에서 물러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다.

제자들중에 서기관이 있었나보다. 이 서기관은 선생되신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겠다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이 고난의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좇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 다른 제자는 예수님께 아버지를 먼저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아마도 예수님의 사역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없는 사람들을 장사하라는 의미인 듯 한데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는 모르겠다. 이 제자는 육신의 아버지의 상속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제자는 하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다.

장모라는 단어는 신약에 몇번 나오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람을 가르키는 경우는 베드로의 장모가 유일하다. 베드로의 장모가 베드로 때문에 아프기 전부터 예수님을 수종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베드로의 장모이기 전에 예수님을 따르며 수종든 많은 여인들 중의 한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역발상을 한다면 베드로의 회심에 장모의 역할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예수님은 치유에도 주도권을 가지셨다. 나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려는 예수님의 뜻이다. 천국은 이런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국을 이땅에서도 맛보는 삶이 제자의 삶이다. 한 서기관의 고백처럼 내가 따르겠다고 결심한다고 따를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제자의 삶은 이 땅에서는 거처가 없는 삶이다. 예수 안에 거처를 삼는 삶이다. 또 다른 제자의 바람처럼 이땅에서 상속을 받고자 하는 삶도 아니다. 하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삶이다. 오히려 부모도 함께 하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도록 인도하는 삶이어야 한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는 길이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