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19-34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신다. 땅에는 좀과 동록과 도둑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야 할 이유를 비유로 가르치셨다. 한 부자가 소출이 풍성하자 곳간을 더 크게 짓고 자신의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두고 평안이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리라 계획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다 하셨다. 예수님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좀과 동록과 도둑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신다. 좀도 동록도 해아지 못하며 도둑도 도둑질하지 못하는 곳이다. 하늘에 쌓아 둔다는 것은 결국은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기관들 보다 더 나은 의를 설명하시며 은밀히 행하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예로 드셨다. 그래야 하나님께 상을 받는다고 하신다. 이 땅에 있는 것을 하늘로 보내 쌓아둘 수 없다. 대신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께 상을 받는다면 하늘에 상을 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구제다. 땅에 보물을 쌓는 자는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자들이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자들은 당연히 의로운 삶을 마음에 두고 산다. 보물이 있는 천국의 삶을 향해 살고 천국백성으로 살아간다.

천국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푯대를 바라봐야 한다. 푯대를 바라보는 눈이 건강해야 천국백성으로의 삶을 살 수 있다. 눈이 나쁘면, 즉 푯대를 바로 보지 못하면 인생의 여정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 푯대는 빛되신 예수님이다. 빛이 어두울 수 없다.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는 말씀은 빛이 없으면, 즉 어두우면 어둠가운데 갇힌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은 구제하라 하시고 재물은 탐심을 가지라고 속삭인다. 당연히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 재물은 끊임없이 내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이웃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게 하신다. 재물은 먹을 것 입을 것에 관심을 갖게 하지만 하나님은 목숨과 몸에 관심을 가지신다. 즉 생명, 하나님과의 사귐에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생명을 어떻게 할 수 없다. 생명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스스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 모든 것의 필요를 아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으라고 하신다.

믿는 자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어제의 말씀에 따르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대표적이 예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다. 그것도 은밀한 중에 행하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다. (그중에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이)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구제다. 그러면 무엇을 먹을 지 무엇을 입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부족함 없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나의 내일은 주님이 알아서 책임져 주신다.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 그날만 괴롭도록 의를 행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염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봐 주시듯 나는 이웃을 돌봐야 한다.

 

마태복음 6:1-18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하늘 아버지께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의를 행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행해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면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의를 행하는 예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드셨다. 의인의 삶의 첫째로 구제를 언급하신 것이 놀랍지 않은가? 오늘날 성도들도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 돌보는 것을 삶의 우선순위에서 첫째에 두어야 함을 산상수훈에서도 확인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은 것이 구원이요 천국백성의 삶이다. 구제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금식을 해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다면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예수님은 경고 하신다. 상은 중복해서 지급되지 않는다. 두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구제도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은밀하게 구제해도 다 보고 아신다.

둘째 기도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다.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도 은밀하가게 기도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밀하게 기도해도 다 듣고 응답하신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지 기도를 친히 가르쳐 주셨다. 이방인들과 같이 지성이면 감천인줄 알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의 필요는 하늘 아버지가 다 아시기 때문에 구하는 기도를 하는 이방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의 기도는 천국이 가까이 오도록  요청하는 기도다. 천국 백성으로 살겠다는 다짐이다. 이땅에서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기도다. 천국 백성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천국백성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시험과 악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기도에서 강조하는 것이 용서다. 거의 강제성을 띤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 백성의 마땅한 삶을 살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더이상 천국 백성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은가? 하나님께 용서 받기전에 사람에게 용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은밀하지만 용서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한편으로 기도를 통해 용서할 힘을 공급받게 된다.

세번째는 금식이다. 금식역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면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예수님는 경고하신다. 금식은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늘 아버지를 뵙고자 하는 행동이다.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것임이요”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를 은밀한 중에 만나주신다. 하나님을 만난다고,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자들을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자들이다.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자들은 우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바람에 요동하는 물결과 같다. 야고보는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소망해야 한다. 이상 저상을 기웃거려서는 안된다.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 받을 상은 온전한 구원이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살아 계셔어 오늘도 나와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간구하신다. (히 7:25) 아멘

하나님께서 주실 상외에 우리가 사모할 것이 또 무엇이랴!

마태복음 5:33-48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특별히 하늘로도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천지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위에 올라 앉으려는 것이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맞으면 예하면 되고 틀리면 아니오하면 된다. 그 이상의 말은 악인의 꾀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계명도 사랑으로 완성하신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앙갚음하지 말라고 하신다. 지나치게 보복하는 것을 금지한 계명이다.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신다.

오른편을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것은 또치려면 쳐보라는 것도, 때리면 그냥 더 맞겠다는 자세도 아닐 것이다. 보복하지 말라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예다. 고발을 당해도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시고, 억지를 당해도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신다. 한마디로 예수의 제자들에게 손해보고 살라고 하신다. 사랑이다. 손해보더라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할뿐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저주의 기도가 아니라 축복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오늘의 자연재해는 어쩌면 성도들이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원수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신다. 화평케 하는 자의 복 그대로다. 성도가 원수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이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다르다. 이방인들의 사랑과도 다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원수까지 사랑하셨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원수 같은 광야의 백성들을 놋뱀을 달아 살리셨듯이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원수같은 우리들을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살리셨다. 원수를 위해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신 사랑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면 원수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임마누엘을누려야 할 이유다. 나는 할 수 없으니깐 나는 죽고 내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성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가 온전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마태복음 5:21-32

예수님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해 가시신다.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사랑으로 완성하신다. 살인은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고 하신다.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도, 형제에게 바보라고 미련하다고 하는 자도 심판을 받아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형제에게 화를 냈거나 형제를 바보라고 놀렸거나 어떤 이유로든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가가나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우선하여 형제에게 가서 먼저 화목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잘못해서) 고소를 당했을 때에도 사과하고 화목해야 한다. 사랑없이 법대로 하자고 하면 안된다. 법대로 하면 결국은 죄값을 치러야 한다. 미움대신 죄값이상으로 사과하고 화목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 사이의 미움을 살인과 동일시 하셨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육체적 간음뿐만 아니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도 간음한 자라고 가르치신다. 나아가서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눈이 실족하게 하든, 손이 실족하게 하든, 실족하게 하는 신체의 일부분이 있다면 빼어 버리고 찍어 버리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음행한 이유없이 아내를 버리거나,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한 자라고 심판하신다. (간음은 사랑이 아니라 성애, 즉 섹스문제다.)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이해는 문자적이지 않다.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계명을 사랑으로 완성하신다. 그리고 우리도 사랑으로 완성된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착한 행실이란 결국 이웃사랑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루에도 몇번씩 살인하며 지낸다. 특별히 운전하면서 나보다 늦게가면 멍청이라하고, 나보다 빨리가면 미친놈이라고 한다는 얘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도로의 운전자는 형제가 아닌가?) 간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대신 눈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도 많고 손으로 갖고 싶은 것도 없지 않다.

오늘도 예수 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다. 나는 할 수 없어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라고 하신다. 살인하지도 간음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이들에게서 돌이키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고 피차 용서를 구하는 것이요, 실족하게 하는 것을 예수 안에서 끊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

마태복음 5:13-20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빛이 착한 행실로 사람들에게 비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다.

착한행실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법의 바탕이 되는 율법을 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을 버리고 또 버려도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고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마귀의 속삭임에 혹해서는 안된다.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된다는 것은 천국 백성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천국에만 들어가면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된들 어떠리라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마귀의 속삭임이다. 그래서 혹시나해서 예수님은 덧붙이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래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란 바로 사랑이다.

바울도 로마서 13:10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말한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롬 13:8 공동번역)

공동번역은 세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다고 하지 않은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이다. 우리가 따라 살아내야 할 삶이다. 난 할 수 없어요라고 핑계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소금과 빛은 성도의 착한 행실이다.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