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이 재건되었다. 52일 걸렸다. 신축이 아니라지만 두달이 채 되지 않아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성벽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이 열심으로 일했다는 반증이다. 한편으로는 제국의 교육과 제도에서 배운 느헤미야의 ‘밀어붙이기’였을 수 있다. 그래선지 반응이 영 시원찮다. 감격과 감사가 없다. 오히려 대적들의 반응만 기록하고 있다. 대적들과 이방이들은 성벽재건 소식에 두려워하고 크게 낙담했다. 대적들과 이방인들은 자신들의 온갖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성벽재건을 할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했다.
(성벽재건의 감격과 감사를 적지 않은 것은 유다에 느헤미야를 음해하려는 시도가 여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 내부에 느헤미야 반대파가 여전히 활개치고 있었다.) 산발랏과 함께 성벽재건을 방해했던 도비야는 유다 귀족들을 선동해서 느헤미야를 압박했다. 도비야는 성벽재건 참여자 명단에 두번이나 이름이 나오는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정략결혼?관계로 도비야는 많은 유다 귀족들과도 친했다. 도비야와 동맹을 맺은 사람들은 느헤미야 면전에서도 서슴없이 도비야를 칭찬했다. 그들은 느헤미야의 말을 도비야에게 고자질 해서 도비야로 하여금 느헤미야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게 했다. 낙하산으로 유다 총독이 된 느헤미야는 외로왔다. 자신은 하나님의 낙하산으로 예루살렘에 왔는데 다른 유다 귀족들과 그 땅을 담당하던 제국의 관리들은 느헤미야가 제국의 왕의 낙하산으로 유다총독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리적 성벽을 재건되었을지 몰라도 영적 성벽재건은 요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벽재건이 끝났다. 성문을 달고 성문지기를 배치했다. (노래하는 사람과 레위 사람들도 배치된 것은 여전히 외침에 대한 위협이 있어서 성문지기 인원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일까?) 느헤미야는 동생 하나니 (예루살렘 소식을 느헤미야에게 알린 형제다.) 와 요새 지휘관 (문관보다는 무관이었을 것이다) 하나냐에게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했다. 느헤미야는 하나냐를 성실하고 (충성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성벽재건과정에서 보여준 느헤미야 자신의 성품과 일치한다. 돈안지유돈(豚眼只有豚) 불안지유불(佛眼只有佛) 이라고 했던가)
느헤미야는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말고 해가 여전히 높이 떠 있을 때 (해지기 전에) 성문을 닫으라고 명했다. 그만큼 예루살렘의 안전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리고 외부인이 아닌 예루살렘 성 사람들로 하여금 지정된 곳에서, 이왕이면 집 가까운 곳에서 경비를 서도록 명했다. (예루살렘) 성읍은 크고 넓은데 거주민은 얼마 안되고 거주할 집도 얼마 없었다는 것은 여전히 치안이 취약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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