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발걸음을 갈릴리에서 유대쪽으로 옮기신다. 여전히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질문했다. 이유가 있으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님은 창세기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라고 대답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옳다구나하면서)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것은 (신24:1-4) 어찌됨인지 따져 물었다.
예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했지만 본래의미는 그렇지 않다고 (이혼을 하면 안된다고) 답변하신다. 이혼은 불가하다고 하신다.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한 자라고 하신다. (남자 문제다.)
제자들은 이혼은 본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곱씹으면 아내와는 이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돌연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린다. 예수님은 독신은 (비혼이라고 해야 하나) 오직 타고난 자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신다. 태어날 때부터든 사람의 손으로든 아니면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든 오직 타고난 자라야 받을 수 있고 받으라고 하신다. 음… 이유는 간단하다. 혼외성애는 다 간음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라고 권면했을까. 바울은 주님의 명령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아야하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아햐 한다.
// 우리는 혼외성애의 죄악에 무뎌진 사회에 산다. 성애(섹스)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혼외성애를 미화한다. 카메라에 담기는 성애의 대부분은 혼외성애가 아닌가? 국경도 나이도 인종도 뛰어넘는 사랑이 아니라 혼외성애에 집착한다. 그러나 성애(섹스)는 사랑의 극히 작은 일부분일 수 있어도 완전한 사랑은 아니다. 오히려 탐욕에 가깝다. 어떻게 아내를 버려도 되냐는 질문이 가능했을까? 이혼증서를 아내를 버리는 수단으로 사용할 정도로 예수님 때도 타락했었다. 이혼을 못한다면 차라리 비혼으로 사는게 좋겠다는 제자들의 반응도 그당시에 혼외성애가, 성매매가 비일비재했음을 시사한다. 유대문화에서 이러했으니 다른 문화에서는 더했을 것이다. 인지상정이라고 치부하고 말것인가? 오늘날 교회안은 어떤가?
오늘날 교회도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혼외성애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다면 동성애에 대해서도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된다.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더 고민을 해봐야 겠지만 동성성애(동성섹스)도 혼외성애의 일부지 더 악하다 덜 악하다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동성애자들을 버려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아라. (사회적) 사형선고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하셨다. 어쩌면 이들(혼외성애자들)이야 말로 천국을 위해서 고자되어야 하는 부류일지도 모르겠다. 미혼이든 비혼이든 이들이야 말로 고자가 되어야 한다. 왜? 혼외성애는 다 간음이기 때문이다.
돈과 섹스가 신이된 사회에 살고 있다. 건강한 가정도 복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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