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9:9-22

창조주요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다. 레위인들은 이 민족적이며 역사적인 하나님을 계속해서 송축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셔서 출애굽 시켜주셨다.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 따라오던 바로와 애굽군은 수장시키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계명과 율례를 백성들에게 주셨다. 특별히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광야 길 동안 양식을 주셨고 물을 주셨다. 그리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차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이 굳어 주의 명령을 들지 않고 거역한 흑역사를  기억한다. 조상들의 거역을 통하여서 용서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조상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자기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신이라고 하나님을 모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신 긍휼로 조상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신 주님을 송축한다. 주의 선한 영으로 조상들을 가르치시고 만나로 먹여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신 주님을 찬양한다. 사십년 광야생활동안 부족함 없이 옷도 해어지 않고 발도 부르트지 않게 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그리고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한 승리도 기억한다.

부흥의 핵심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자복할 수 밖에 없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더디 노하시는 하나님!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 어찌 이런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을 수 있을까? 심지어 금송아지로 하나님을 크게 모독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크신 긍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버리지 않으셨다. 큰 모독을 받으셨음에도 더 큰 긍휼로 용서하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었으나 (5:20)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6:1)> 라고강조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씀을 듣고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을 송축하는이유다. 그렇다.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오 주님 제가 주님께 범죄하지 않으려고,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제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합니다. 저를 길러 주시고 부족함 없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느헤미야 9:1-8

칠월 이십사일. 초막절이 7월  15-22일이고 여덟째날 (23일) 성회로 모인 다음 날 이스라엘 자손이 모두 모였다. 그냥 모든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언약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뉘앙스를 받는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했다. 이방과의 절교와 죄를 자복한 순서가 새롭게 다가온다.

하여간 이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낮 사분의 일은 (세시간 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시간 정도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께 경배했다. ‘말씀 선포’와 ‘죄 고백’은 전형적인 부흥의 모습이다.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를 하나님께 부르짖는 레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무리 중에 다니며 회중들에게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외치는 레위사람들도 있었다.

송축한 내용을 새번역으로 읽으면…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영화로운 이름은 찬양을 받아 마땅합니다. 어떠한 찬양이나 송축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다 기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홀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과, 거기에 딸린 별들을 지으셨습니다. 땅과 그 위에 있는 온갖 것, 바다와 그 안에 있는 온갖 것들을 지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하늘의 별들이 주님께 경배합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시어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진실함을 아시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의 땅을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그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의로우셔서, 말씀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 사람들과 절교했다는 것은 이방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는 의미지 더이상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용서받기 전에 이방 사람들과 절교했다. 잘못에서 돌이켰다. 용서받고 못받고를 떠나 잘못에서 돌이키는 것은 (회개는) 중요하다. 송축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창조주요 생명의 주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이 의로우신 주님은 바로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잘못에서 돌이켰다는 것은 곧 용서받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그냥 백성들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 자손, 즉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다.

창조주요 생명의 주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사귐을 회복하는 것이 부흥이다. 부흥의 시작은 회개다. 주님은 우리 마음이 아브라함처럼 진실하길 원하신다. 충성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신앙(믿음)이다.

 

느헤미야 8

느헤미야 8
 
(주민등록이 끝나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했다. 일곱째 달은 언제지? (성벽재건이 엘룰월에 마쳤는데 그냥 일곱째 달이라고 하면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름하기 어렵다.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하여간 느헤미야의 빨리빨리 밀어붙이기식 일처리를 생각하면 주민등록을 마치자마자 곧바로라고 생각된다.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느헤미야가 백성들을 소집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달라고 요청했다. (다시한번 일곱째 달 초하루라고 적는 것으로 보아 날짜가 중요한가 보다.) 에스라는 율법책을 가지고 수문광장에 모인 회중 앞에 서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책을 읽어주었고 회중들은 귀기울여 들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하는 강단 좌우로 맛디댜 스마 아나야 우리야 힐기야 마아세야 (이상 6명이 에스라 오른쪽에) 브다야 미사엘 말기야 하숨 하스밧다나 스가랴 므술람 (이상 7명이 에스라 왼쪽에) 총 열세명이 섰다. ( 아마도 에스라와 번갈아가며 율법책을 봉독했을 것이다.)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율법책을 읽어주기 위해 책을 폈을 때 모든 백성은 일어났다. 에스라가 먼저 야웨 하나님을 송축하자 백성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몸을 굽혀 얼굴이 땅에 닿도록 야웨께 경배했다. 또 열세 명의 이름들이 나온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서 있는 백성들 사이를 오가며 율법을 설명해 주었다. (보혜사 성령님의 역할이랄까? 귀환자들의 후손이라 히브리어를 잘하지 못해 통역의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왜 열둘 열둘이 아니고 열셋 열셋일까?)
 
백성이 율법을 듣고 깨닫자 울기 시작했다. 말씀을 깨닫고 우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역할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 전에는 울 수 밖에 없다.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들 사이를 오가며 말씀을 깨우쳐주던 레위사람들이 백성들에게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위로하였다. (느헤미야가 어디 갔나 했다. 그도 겸손히 백성들 가운데서 함께 말씀을 들었나 보다.)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이 학사 에스라가 아닌 말씀을 듣고 깨달은 느헤미야에게서 나왔다. ) 느혜미야는 백성들에게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라고 말하면서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나눠주라고 적용한다.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라고 위로하였다. 백성중을 다니던 레위 사람들도 백성들에게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이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고만 말하였다. (다들 근심하지 말라고 말만 할 때 느헤미야가 먹고 마시며 나누며 기뻐하라고 적용했다면 너무 편협한 생각일까?) 모든 백성이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큰 즐거움의 이유를 느헤미야는 먹고 마시고 배불러서가 아니라 들은 율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것과 마시는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임을 알았을까?)
 
율법에 대한 깨달음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 되었는지 (하나님나라를 맛본) 백성들은 그 다음날에도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율법의 말씀을 보았다. 그리고 율법에서 초막절에 관한 명령을 보고 적용하기로 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회중이 모두 초막을 짓고 그안에 거했다고 기록한다. 역사적으로 여호수아 때부터 처음있는 대대적인 (규모적으로 가장 컸다는 뜻이 아닐까) 초막절 행사였다고 기록한다. 초막절 일주일 기간 내내 하나님의 율법책은 낭독되었다. (백성들은 율법에 대한 깨달음으로 기뻐하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덟째 날에 규례대로 거룩한 모임을 가졌다.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는 (성벽재건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적용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물리적 성벽재건으로도 하나될 수 없었던 귀환자들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먹을 것을 나눠 먹으면서 (사회적으로 하나되고), 초막절 절기를 지키면서 (종교적으로도) 하나되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같은 음식을 먹었을 것이며 부자나 가난한 자나 비슷비슷한 초막을 짓고 일주일을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들었다. 말씀 앞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겸손하게 한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기 위해서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요즘에는 에스라처럼 성경을 읽어주는 앱도 있고 백성들 사이로 다니며 말씀을 깨닫게 설명해 주는 레위인들 같은 앱도 있지만) 오늘도 살아계서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을 구하면서 말씀을 읽는다. 그러고 보니 혼자 읽기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읽기다. 적용도 개인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인 깨달음으로 나갈 수 있으면 더 좋겠다.
 
느헤이먀 8 읽기

느헤미야 7:5-73

(본문 길이에 압도 당하다.) 느헤이먀는 하나님께 감동되어 유다백성들에게 주민등록을 하게 한다. (물론 순서상으로는 하나님께 감동되어 1차 귀환자 명부를 찾아 본 것으로 되어있지만)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감동된 것은 환상이나 주님의 음성을 들어서가 아니라 근 한세기 전에 작성된 스룹바벨의 1차 귀환자 명부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느헤미야는 이 귀환자 명부를 다시 기록할 정도로 자세히 살폈다. (오늘날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록된 성서 말씀을 읽을 때 보혜사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심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감동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런데)

느헤미야는 1차귀환자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다는 기록을 보았다. 느헤미야는 읽으면서  왜 예루살렘은 성읍은 큰데 그 주민은 적을까?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주민등록을 새로 실시해 예루살렘이 고향인 사람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돌아와 거주하게 할  심산이었을 것이다.

남의 기록을 열심히 들여다 볼 이유는 없으나 귀환자 42360명에 노비가 7337명, 말 노새 낙타 나귀를 다합하면 이동용 가축만 8천마리가 넘는다. 엄청난 규모다. 제국에서 한 몫을 잡은 사람들이 귀환을 한 것이다. (5인가족에 한마리 정도니 모두 자가용을 타고 귀환한 셈이다.  장거리 여행에 꼭 필요한 가축이었다. 거기에다 집집마다 노비까지 한명씩 거느렸다.그렇다면 모르드개처럼 제국에 남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너무 가난해서 귀환하지 못했을 것이다. 뇌피셜이다.) 그리고 1차 귀환후에 거의 한세기기가 흘렀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반세기는 훌쩍 넘는다.) 제국에 남아 제국의 교육을 받아 제국의 제도권에 들어간 느헤미야는 요즘말로 하면 개천에서 난 용이다. 이제야 성벽재건 후에도 유다 귀족들이 느헤미야를 홀대한 태도가 이해된다. (과연 그랬을까?)

하여간 정작 느헤미야가 실시한  백성들의 주민등록부는 따로 기록하지 않는다. 1차 귀환자 명부가 너무 자세해서 또 1차 귀환 인원에 비해, 심지어 에스라 때와 비교해도 느헤미야 자신과 함께 귀환한 인원이 상대적으로 너무 적어서 굳이 추가로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까? 아니면 느헤미야 자신은 영구 귀환이 아니어서 애당초 귀환자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일까?

느헤미야는 성벽재건 후 예루살렘 성읍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읍은 크고 넓으나, 인구가 얼마 안 되고, 제대로 지은 집도 얼마 없었다. 4절 새번역>  당연히 이주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주민등록의 목적은 예루살렘이 고향인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1차 귀환자 명부를 붙들고 씨름하지 않았을까?

예수님도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거주하길 원하신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우리 거처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나라는 큰 성읍으로 거할 곳이 많다. 그렇지만 황금집이 있는 곳은 아니다. 대신 우리 주님이 계신 곳이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삼위 하나님과 거처를 함께 하는 곳이다. 임마누엘! 이 땅에서 임마누엘을 누리는 자는 여전히 적다. 예수님은 하늘에 기록된 우리 이름을 보며 중보하신다.

느헤미야 7:5-73 혼자 읽기

 

 

느헤미야 6:15-7:4

성벽이 재건되었다. 52일 걸렸다. 신축이 아니라지만 두달이 채 되지 않아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성벽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이 열심으로 일했다는 반증이다. 한편으로는 제국의 교육과 제도에서 배운 느헤미야의 ‘밀어붙이기’였을 수 있다. 그래선지 반응이 영 시원찮다. 감격과 감사가 없다. 오히려 대적들의 반응만 기록하고 있다. 대적들과 이방이들은 성벽재건 소식에 두려워하고 크게 낙담했다. 대적들과 이방인들은 자신들의 온갖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성벽재건을 할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했다.

(성벽재건의 감격과 감사를 적지 않은 것은 유다에 느헤미야를 음해하려는 시도가 여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 내부에 느헤미야 반대파가 여전히 활개치고 있었다.) 산발랏과 함께 성벽재건을 방해했던 도비야는 유다 귀족들을 선동해서 느헤미야를 압박했다. 도비야는 성벽재건 참여자 명단에 두번이나 이름이 나오는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정략결혼?관계로  도비야는 많은 유다 귀족들과도 친했다. 도비야와 동맹을 맺은 사람들은 느헤미야 면전에서도 서슴없이 도비야를 칭찬했다. 그들은 느헤미야의 말을 도비야에게 고자질 해서 도비야로 하여금 느헤미야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게 했다. 낙하산으로 유다 총독이 된 느헤미야는 외로왔다. 자신은 하나님의 낙하산으로 예루살렘에 왔는데 다른 유다 귀족들과 그 땅을 담당하던 제국의 관리들은 느헤미야가 제국의 왕의 낙하산으로 유다총독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리적 성벽을 재건되었을지 몰라도 영적 성벽재건은 요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벽재건이 끝났다. 성문을 달고 성문지기를 배치했다. (노래하는 사람과 레위 사람들도 배치된 것은 여전히 외침에 대한 위협이 있어서 성문지기 인원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일까?) 느헤미야는 동생 하나니 (예루살렘 소식을 느헤미야에게 알린 형제다.) 와 요새 지휘관 (문관보다는 무관이었을 것이다) 하나냐에게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했다. 느헤미야는 하나냐를 성실하고 (충성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성벽재건과정에서 보여준 느헤미야 자신의 성품과 일치한다. 돈안지유돈(豚眼只有豚) 불안지유불(佛眼只有佛) 이라고 했던가)

느헤미야는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말고 해가 여전히 높이 떠 있을 때 (해지기 전에) 성문을 닫으라고 명했다. 그만큼 예루살렘의 안전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리고 외부인이 아닌 예루살렘 성 사람들로 하여금 지정된 곳에서, 이왕이면 집 가까운 곳에서 경비를 서도록 명했다. (예루살렘) 성읍은 크고 넓은데 거주민은 얼마 안되고 거주할 집도 얼마 없었다는 것은 여전히 치안이 취약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