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24 (1-31)

사관은 다윗왕국을 이야기 하면서, 성전건축 준비를 하면서 레위자손을 소환하고 모세와 아들들을 불러내더니 아론의 아들들도 다시 불러낸다. 사관은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아론보다 먼저 죽은 것만 언급하지 굳이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는다. 그리고 세째 엘르아살과 네째 이다말을 통해 제자장 직분이 이어졌다고 적는다.

다윗시대에는 엘르아살 자손 사독과 이다말의 자손 아히멜렉 두 제사장이 있었다. 다윗은 이들에게 업무를 나눠 맡겼다고 한다. 16:8로 엘르아살의 후손이 이다말의 후손보다 두배로 많았으나 직무는 제비를뽑아 두 가문에 차등없이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다윗왕과 사독과 아히멜렉과 제사장과 레위사람의 대표 입회하에 서기관 스마야가 엘르아살 집안에서 한집 (대표 한명) 이다말의 자손 중에서 한집 이렇게 번갈아 가며 성전의 일을 다스리는 자와 하나님의 일을 다스리는 자를 뽑았다. 아론의 자손 24가문 (엘르아살 16, 이다말 8) 모두 제비 뽑힌 순서에 따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직무를 맡았다.

사관은 레위자손 중 남은 자들의 직무도 아론의 자손들의 직무를 정할 때처럼 다윗왕과 사독과 아히멜렉과 제사장과 레위사람 대표 앞에서 제비 뽑아 정해졌다고 기록한다. 제비를 뽑음으로 장자의 가문과 막내동생의 가문에 차별이 없었다고 기록한다.

제비뽑기는 가히 혁명적이다. 다수당이라고 상임위자리를 독차지 할 수 없고 순서에 따라 제비를 뽑아야 했다. 먼저 제비를 뽑았어도 상대적으로 힘든 직무를 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장자와 막내의 차별도 막을 수 있었다. 장자가 두배의 몫을 상속받던 유대 전통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나라는 기득권이 없는 제비뽑기 나라임을 미리 보여주는 기록이다. 레위 자손들은 이스라엘 중에 분깃이 없고 기업(유산)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신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젠 2:9)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신다.

역대상 23:1-32

늙은 다윗은 아들 솔로몬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이스라엘 모든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싸움에 나갈 사람이 아닌 레위사람을 계수했다. 민수기의 말씀처럼 30세 이상으로 계수하니 3만 8천 명이라고 한다. 사관은 레위인의 업무를 성전이 일을 보살피는 것 외에 관원과 재판관 문지기 찬양대로 구분한다.

사관은 다윗이 레위 자손을 게르손 그핫 므라리 세분하여 이들의 자손들의 이름도 기록한다. 특별히 아므리의 아들 아론과 모세를 따로 언급한다. 특이한 것은 삼십세 이상의 레위인을 계수하였는데 24절에 보면 여호와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이십세 이상된 우두머리라는 표현이 나온다. 아마도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봉사를 시작하는 연령을 낮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나님께서 평강을 그의 백성에게 부시고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시니 레위사람이 다시는 성막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 고 선언한다.

다윗의 유언대로 레위 자손이 20세 이상으로 계수되었다. 성전이 완공되면 필요한 세세한 직무까지 고려했던 모양이다. 아론의 자손들로 이어지는 제사장 직분뿐만 아니라 성전 뜰과 골방에서 하는 일, 성물을 미리 준비하는 일, 진설병 준비, 찬양 등등 제사장들이 직무를 잘 지킬 수 있도록 수종드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성전의 직무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니 직무의 귀천이 있을 수 없다.

// 레위인을 계수할 때 문지기 4천명, 찬양대 4천명이었다. 동수다. 오늘날 교회와 뭔가 다르다. 오늘날의 교회제도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만 찬양하는 만큼 안내도 해야 하고 찬양의 직무만큼 안내의 직무도 귀한 줄 알아야겠다.

 

역대상 22:1-19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오르난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다윗은 이곳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곳이 이스라엘이 제사드릴 곳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직접 성전을 짓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다윗의 자손이 성전을 지을 것이라는 약속에 따라 성전건축을 준비한다.

다듬은 돌과 철과 놋과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다고 한다. 다윗은 어린? 솔로몬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 두었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건축하기를 부탁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들려준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은 친히 아들 삼아주시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아버지가 되어 다윗나라의 왕위를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들려준다. (임마누엘!) 다윗은 성전을 건축할 솔로몬에게 임마누엘의 축복을 한다. 다윗은 성전건축을 하라는 부탁과 함께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원한다’ 라고 축복한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근거요, 또 지혜가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임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알았다. 성전이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삼가 행하는 것이 형통이라는 것을.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임을.

다윗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무수한 자재들을 준비했으면서도 솔로몬에게 더하라고 명한다. 자재뿐만 아니라 석수 목수 온갖 일에 익숙한 장인들도 준비해 주었다. 솔로몬은 그저 일어나 일하면 되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도 솔로몬을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그 이유를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이 평안의 원천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을 지속적으로 누리게 해 달라고 마음과 뜻을 바쳐 하나님께 구하라고 한다. 하나님께 구한대로 일어나 솔로몬을 도와 성전을 건축하라고 한다.

성전 (이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즉 임마누엘의 아이콘, 이미지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율법을 삼가 행하는 것이다.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으며 평온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준주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지어가는 것이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다. 내 사명 네 사명이 따로 있을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다. 누구는 준비하고 누구는 성취하고의 관계가 아니다.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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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성전을 건축할 솔로몬에게 임마누엘의 축복을 한다. 다윗은 성전건축을 하라는 부탁과 함께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원한다’ 라고 축복한다. 다윗은 성전이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삼가 행하는 것이 형통이라는 것을 알았다.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도 솔로몬을 도와주라고 부탁하면서 임마누엘을 상기시킨다. 임마누엘이 평안의 원천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을 지속적으로 누리게 해 달라고 마음과 뜻을 바쳐 하나님께 구하라고 한다. 솔로몬을 도와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임마누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임마누엘! 가시적 건물, 성전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을 삼가 행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임마누엘을 누리는 길이다.

 

역대상 21:18-30

하나님의 사자가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는 주님은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과 갓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전에는 다윗이 직접 묻고 직접 하나님 말씀을 들었던 것 같은데…)

갓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다윗은 말씀에 순종한다. 다윗은 오르난에게 가서 타작마당을 비용을 주고 사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셨다. 비로소 일단정지된 천사의 칼은 칼집에 다시 꽂혔다.

이때 다윗은 주님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응답하신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렸다.  모세 때 지은 성막과 번제단이 기브온 산당에 있었으나 다윗이 여호와의 천사의 칼이 두려워 그곳에 가서 하나님께 묻지 못했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음. 다윗은 용서를 구하며 제사하려고 갓을 통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전통이 있는기브온 산당으로 가려고 했을지 모르겠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듣는 귀가 막혀버린 다윗이었지만 기브온에서 에봇을 입고 하나님께 물으면 직접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윗의 비극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후 자신을 모세와 동일시 하는 교만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치려는 천사의 칼을 다윗을 향해 겨누셨을 것이다. 다행이 다윗은 아직 영안을 뜨고 있었다

이 장막 저 장막, 이 성막 저 성막에 계신던(대상 17:5) 하나님께서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새롭게 머무시기로 정하신 것이다.

오 주님 제 마음에도 머무소서.

시편 73편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역대상 21:1-17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1) 드뎌 올것이 왔다. 결코 갑자스런 일이 아니다.

18장 14절에서 사관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19장 20장의 다윗왕국의 승승장구를 읽으며 하나님과 멀어지는 다윗의 모습을 보았다. 승승장구할 때마다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착각에 빠졌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서도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는 정의와 공의 대신 군림했다. 다윗이 암몬왕에게 빼앗은 금 한달란트의 왕관을 자신의 머리에 썼다는 기록은 다윗이 머리에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망각했다는 충분한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교만이 하늘을 찌를듯한 다윗이 사탄의 먹이감이 된 것은 당연하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야에 대한 살인교사를 피할 수 없었던 이유다.

다윗은 사탄의 충동질에 빠져 요압과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하라고 명한다. 정의와 공의로 백성들에게 행하던 다윗은 어디가고 전쟁과 노역에 동원하고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행하는 세상임금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하나님과의 교제가 뭔지도 모르는 요압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인구조사는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는 일이라며 다윗을 만류했다. 그러나 다윗은 요압을 재촉했다. 요압은 하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해서 다윗에게 보고한다.

이스라엘 중에 110만명, 유다 중에 47만명. 사관은 요압이 다윗의 명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않았다고 토를 달았다. 요압이 마땅치 않게 여긴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악하게 여기시고 이스라엘을 치시기로 하셨다.

하나님이 회초리를 꺼내 들자 다윗은 하나님께 이 일로 큰 죄를 범했음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용서해 주세요.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를 잃었나보다. 하나님은 다윗의 선견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세가지 벌칙중 하나를 정하라고 하셨다. 1) 삼년 기근 2) 다윗이 패전하여 석달동안 적군에게 쫓겨 다녀야 함 3) 이스라엘에 삼일동안 전염병 창궐하며 하나님의 천사가 이스리엘 온 지경을 멸함.

다윗은 주님의 긍휼하심에 의지하여 3)번을 선택한다. (13절은 곱씹어 봐야한다.) 주님은 이스라엘에 전염병을 내리셨고 이스라엘 백성중에 죽은 자가 칠만명이었다. 주님은 하나님의 천사를 예루살렘에도 보냈다. 그러나 갑자기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명하셨다. 주님이 갑자기 긍휼을 베푸신 이유를 사관은 역설적이게도 칼을 빼어들고 예루살렘을 치려는 하나님의 천사를 본 다윗이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옷을 입고 (장로들과)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자신이니 무죄한 백성에게는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라고 중보했기 때무니라고 기록한다.

교만은 하나님과 단교하게 한다.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막아버린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와 함께 하실 수 없으시다. 오직 심판만 하실뿐이다. 주님께 겸손히 죄를 자복하고 자비를 구할 때  주님은 다시 만나주신다. 겸손 겸손 또 겸손! 술취함이 방탕한 것이며 형통함에 취하는 것은 교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