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20 (1-8)

해가 바뀌어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해마다 조공계약을 갱신하러 다니면서 조공을 거부한 주변국은 징벌하는 때라는 것인지. 아니면 기후상 전쟁하기 좋은 계절때마다 출정해서 주변국을 다스렸다는 것인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어 다윗대신 요압이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서 (19장에서 밉상을 산) 암몬과 싸워 암몬 왕이 있는 랍바성을 함락시켰다. 승전소식에 다윗은 랍바성으로 달려가서 암몬왕의 왕관을 빼앗아 무게를 달아보았다. 왕관 무게가 금 한달란트였다. 다윗은 그 왕관을 자기가 썼다. 그리고 전리품을 챙기고 암몬 백성들은 노역을 시켰다. 그리고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오호 통재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줄어든 (끊겼다고까지 말하기는 그렇다) 다윗은 결국 하나님의 기름부음 대신 금 한달란트의 왕관을 택했다. 정의와 공의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이라면 당연히 주변국에 대해서도 정의와 공의로 다스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금 한달란트 왕관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금 한달란트는 고고학적으로 따져 약 34kg 이라고 한다. 머리에 쓰는게 아니라 머리에 이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달란트 단위가 달랐을 수도)

정의와 공의로 주변국과의 관계를 확립하지 못한 다윗왕국은 전쟁과 전쟁을 거듭한다. 살아 남기 위헤서라기 보다 군림하기 위해서 (자꾸 삐딱하게 성경을 읽게 된다. ㅠ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는 후사 사람 십브개가 전쟁영웅으로, 이어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는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블레셋과의 또 다른 전쟁에서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전쟁영웅으로 떠오른다. 이들은 모두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전쟁영웅 다윗 왕의 아류들이다. 사관은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로 역사를 채움으로 다윗왕국의 역사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음을 꼬집는 것은 아닐까?

나는 머리에 무엇을 쓰려고 하는가?

 

역대상 19 (1-19)

암몬왕 나하스 문상 조문단을 파견한 다윗은 예상치 않은 나하스 아들 암몬 왕 하눈의 박대를 당한다. 더군다나 하눈은 다윗에게 밉게 보였다는 것을 깨닫고 사과하는 대신 전쟁이라는 악수를 두고 만다. 혼자 힘으로 안되니 아람사람의 군대를 용병으로 사서 전쟁에 임했다. 용병은 병거만 삼만이천대라고 하니 엄청난 규모다.

다윗은 군대장관 요압과 용사들을 보내 전쟁에 임한다. 요압은 암몬과 아람 연합군을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둘로 나눴다. 요압은 아람군대를 그리고 요압의 동생 아비새는 암몬 군대에 대하여 진을 치고 싸우기로 했다. 요압은 아비새에게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너를 도우리라” 라고 말했다. 멋진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람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돈받고 싸우는 아람군대는 요압군대 앞에서 도망했다. 당연히 암몬 군대도 도망(철수)하였고 요압은 승전가를 부르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패주한 아람군대였다. 아람군대는 패전을 만회하기로 했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요단 건너편에 있는 동족 아람사람들 모두를 참여시킨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이번에는 친히 군대를 모으고 요단을 건너가 아람사람들과 전쟁을 했다. 다윗은 아람병거 칠천대의 군사와 보병 사만명을 죽이고 아람군 대장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이후로 아람은 다윗과 화친을 맺고 조공국이 된다. 당연히 아람은 암몬과의 동맹을 원하지 않게 된다.

// 왕국으로서의 체계가 갖춘 다윗왕국의 승전소식이다. 암몬과 아람 용병의 연합군과의 싸움에는 다윗이 직접 나가지 않고 군대장관 요압만 보내도 될 정도로 다윗왕국은 군사적으로 주변 부족국가들을 압도했다. 아람과의 전쟁에서도 다윗이 친히 출정했지만 싸움이 되지 않았다. 잘나가는 집안의 문제점이 여기서 보인다. 굳이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잘나가는 다윗. 다윗왕조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다윗은 과연 하나님과 더 친밀해졌을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또 내가 삐딱하게 보는 것일까? 매순간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요하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더이상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기 쉽지 않은가?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과 신실한 교제를 지속할 때 유효하다.

역대상 18 (1-17)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6b)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13b)

(그래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14)

다윗의 승승장구(1-13)와 다윗왕국의 정치체계완성 (15-17) 사이에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다는 구절이 삽입되어있다. 5.18 아침이다. 잠언 29장 2,7절을 다시 소환한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학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2)”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7)”

사실 7절이 없었으면 2절은 나에게도 그냥 성경 한 구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악인이 권세를 잡아 백성이 탄식함을 핏대세우며 떠들지만 의인이 적음은, 아니 내가 의인이 되고자 하는 열정은 적다. 그렇게 살아왔다. 5.18은 악인이 권세를 잡아 백성이 탄식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의인이 적어서 일어난 사건이기도 하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다고 추상적으로 대답하면 쉽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고 하면 서서히 어려워진다. 산위에서 하나님나라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의 일성이 무엇인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 아닌가? 예수 믿으면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의인이라는 소리다. 의인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리고 잠언에서는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라고도 적용한다. 물질적 가난함만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가난함이다. 5.18은 가난한 자를 알아 줄 지식이 없는 악인이 권세를 잡아 잔행된 사건만이 아니라 의인이 많아지지 않아, 아니 소위 의인들이 의인됨을 망각해서 그 치유마저 제대로 이루지지 못한 사건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의인이 많아져서 백성들이 기뻐하면 좋겠다.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나라를 기대한다면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사회적 약자들의 사정을 알아주는 의인들이 많아져야 한다. 나부터 앞장서라 하신다.

 

역대상 17:16-27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들은 다윗은 성막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했다. 다윗의 기도는 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심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감사와 마찬가지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의 간절함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줄이면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할 수 있다.

25절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에게, 이 종의 집안을 한 왕조가 되게 하시겠다고 계시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종이 감히 주님께 이러한 간구를 드릴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주신 복을 영원히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매일 기도해야 할 내용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임마누엘을 영원히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에게는 오늘의 교훈이다.

역대상 17:1-15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하나님의 언약궤는 휘장아래 있도다.” 다윗은 자신의 궁궐과 성막을 비교하면서 선지자 나단에게 성전건축의 뜻을 내비췄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행하소서’ 라고 권면한다. 지금까지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땠을까? 다윗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이였다. 다윗이 하나님께 물으면 하나님께서는 대답해 주셨다. 다윗은 성전건축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성전건축을 할까요?’ 라는 물음에 침묵하신 것 같다.  아마도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지자 조바심이 난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조언을 구한듯 하다. 선지자 나단도 다윗이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자라는 것을 모를리 없었다. 나단은 쉽게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행하소서’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정직한 다윗이라면 나단에게 성전건축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대답하지않으신다고 솔직하게 상의했어야 했다. (삼상 14: 37이하 사울도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응답하지 않으시니 제멋대로 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왕이라는 지위에 겨워  사울처럼 함부로 행하지 않도록  선지자 나단을 소환하셨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과연 침묵만 하셨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 다윗에게도 나단에게와 동일한 응답을 하셨을 것인데 다윗은 열방의 왕들처럼 신전을 세우고 하나님의 궤를 모시려는 공명심(功名心)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응답을 못듣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님께서는  公明心(공명심)의 선지자 나단에게  功名心의 다윗이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장막과 저 장막에서 만나 주셨지 성전건축을 명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강성한 대국과 화려한 왕궁에 살아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목장에서 목동으로 일할 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다. 그리고 다윗을 세상에서도 존귀한 자로, 이스라엘을 악한 사람들이 해치지 못하는 나라로, 오히려 대적들이 복종하는 나라로 다윗왕조를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 중 하나를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실 것이고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것이며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왕과 백성의 관계를 영원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새롭게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실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신다고 하신다. 결국 하나님나라에 하나님 자녀의 나라를 세우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안에 있으니 당연히 그의 왕위가 (그의 통치) 영원히 견고할 수 밖에 없다.

나단은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