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6:23-43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지어다.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들을 세워 찬양한 주님은 모든 민족 중에, 만국의 신들 중의 신(하나님)이시다.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 아니시다.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다윗의 찬양은 열방이 영광과 권능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라고 노래한다.

하늘이 기뻐하고 땅이 즐거워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땅이 즐거워 하는 이유는 주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비약이다.) 사실 심판주 앞에서 즐거이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숲속의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시편1편의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들이 많아지고 많아져서 숲을 이루는 것이 연상되지 않는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에 감사하게 된다. 만국의 통치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구원이라고 노래한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멘

다윗은 아삽과 그의 형제들이 언약궤를 섬기도록 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것은 감사찬송뿐이리라. 다윗은 오벧에돔과 그의 형제들과 또 다른 오벧에돔과 호사를 문지기로 삼았다. 제사장 사독과 그의 형제들은 기브온 산당에 있는 성막에서 제사장직분을 담당하게 하였고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대로 직분을 담당하였다. 다윗은 이들 외에도 감사기도하는 사람, 찬양대 반주하는 사람, 문지기도 세웠다.

언약궤를 다윗성 성막에 옮겨놓는 이 모든 의식을 마치고 사람들은 각각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다윗도 자기 가족들을 축복하려고 돌아갔다.

역대상 16:1-22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에 쳐놓은 장막 가운데 두었다. (다윗성에 쳐놓은 장막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양식대로 세웠을까?) 하여간 장막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드린 번제와 화목제와 어떻게 다를까? )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떡과 과자를 나누어 주었다.

다윗은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섬기며 하나님을 칭송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도록 아삽을 대장으로 하는 찬양대?를 조직하게 했다. 비파와 수금과 제금으로 찬양하는 사람, 나팔을 부는 사람. 사관은 다윗과 아삽이 찬양으로 백성들을 가르친 내용을 적는다. 시편 105편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기사를 만민중에 알리며,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구하는) 즐거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하나님을 찾도록 했다.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기사와 이적과 율법을 기억하도록 했다… 하여간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는데 좋은 운율에 따른 찬양만큼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 하여간 오늘의 궁금증은 다윗이 드린 번제와 화목제는 제사장에 대한 월권이 아니었나?… 사관은 의도적으로 다윗을 모세급으로 승격시키는 것인가? 다윗이 제사장으로 하여금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했다고 이해하면 간단하긴 한데… 노래를 가르칠 때는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를 세웠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는데 (7절)

역대상 15 (1-29)

다윗성에 궁전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를 둘곳도 마련되었다. 바로 장막을 친 것이다. 13장 정치적 전시행정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려고 했던 계획이 틀어지자 다윗은 두려워하였다. 그렇게 석달이 흘러갔다. 그러나 다윗은 석달동안 두려움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하나님께 묻도 또 묻었던 것 같다. (석달 안에 다윗 궁전을 짓고 블레셋과의 두번의 싸움에서 승전하고… 그러니 13-15장은 시간 순서로 꼭 기록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궤 둘 곳을 위하여 장막을 쳤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궤는 레위 사람들만이 메고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고자 아론 자손과 레위 사람을 모았다. 장교들이 주가 되고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자문관이 되는 군사작전이 아니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주가되는 종교의례가 된 것이다.

작은 궤 하나를 옮겨오는데 얼추 천명가까운 레위 사람들을 모았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그리고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중심으로 레위 사람들 중 고핫 므라리 게르솜 엘리사반 헤브론 우시엘 자손의 지도자를 불러 궤를 옮기는 일을 맡긴다. 제사장들과 레위 자손들은 다윗을 따라 몸을 성결하게 하고 모세오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궤를 옮겼다.

16절. 다윗은 또 레위 사람의 지도자 (어른)들에게 명령하여 노래하는 자들과 비파와 수금과 제금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을 세웠다. 3장 8절에서 다윗이 나름 이스라엘 온무리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한 것과 비교하면 성가대 역시 체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막춤이나 아무 노래가 아니었다. 몸을 성결하게 한 것뿐만 아니라 세마포 겉옷을 입었다고 한다. (다윗은 에봇을입었다고 한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다. 다윗이 대제사장이 입던 특별한 에봇을 입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음 사관은 왜 굳이 다윗이 에봇을 입었다고 기록했을까? 제사장이 아니었는데…다윗이 종교적으로도 대장임을  보이려고 했을까? 음)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은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행렬에 참여한다. 이스라엘 무리들도 성가대가 뿔나팔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는 소리에 맞춰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올리는 일에 참여했다. 이제 다윗의 두려움은 희락으로 변했다. 왕의 신분을 잊고 하나님 앞에서 종의 신분으로 춤추며 뛰놀았다.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의 아내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의 이런 모습을 보고 업신여겼다. 삼하 6장에서는 이 일로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삼하에서 다윗은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뛰놀아 종처럼 천하게 보일 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다고.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삶!

역대상 14 (1-17)

두로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신들과 백향목과 석수와 목수를 보내 다윗 궁전을 건축하게 하였다. 두로왕은 다윗이 강성해지기 전에 다윗과 형제관계를 맺는 외교정책으로 썼던 모양이다. 한편으로 다윗은 두로와의 형제관게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확실한 징표로 여겼다. 그리고 다윗왕국이 높이 들림을 받은 것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도 알았다. 왕정시대에 나라가 높이 들리는 것이 왕이 아닌 백성을 위해서라는 깨달음이라니! (하나님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나님이 높이 들림을 받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높이 들림을 받아야 하나님이 높이 들림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관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도 아내들을 맞아 아들들과 딸들을 낳은 것으로 다윗의 왕권이 내적으로 견고해졌고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김으로 외적으로도 확립되었다고 기록한다.

8절 두로왕과 달리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을 공격했다. 그러자 10절에서 다윗이 블레셋을 치러 나갈지, 승전할 지 하나님께 물었고 주님께서는 싸우러 나가라 승전할 것이다 라고 답하셨다. 당연히 다윗은 싸움에서 이겼다.

13절에 블레셋이 다시 침범했다. 다윗은 이번에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군대대장으로 전략전술까지 알려주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쳐서 다윗 지경을 넓혔다. 다윗의 명성이 온세상에 (주변국에) 퍼졌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방민족으로 다윗을 두려워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신을 두려워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짧은 블레셋과의 싸움 기록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없어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답을 들었다.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려고 했던 것이 전시행정임을 확인시켜준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와서 호가호위 하려고 했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리듯 하나님의 궤의 위세를 빌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궤를 우상화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다윗에게 하나님의 위세를 빌려주신다. 다윗이 다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16)

우리의 명성은 많은 수의 성도나 눈에 보이는 크고 화려한 예배당으로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할 때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로만 얻을 수 있다.

역대상 13:1-14

다윗은 천부장 백부장 곧 모든 지휘환과 더불어 의논하고 일을 처리했다. 원탁의 리더쉽이라고 해야 하나. 지휘관들의 동의를 구하는 협의의 리더쉽이 더 맞을 듯.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올 계획은 지휘관들과 세우고 이분야의 전문가들인 제사장들을 불러모아 자문을 받은 후 국민투표에 붙였다. 뭇 백성들도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에 찬성표를 던졌다.
다윗의 진두지휘아래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아비나답의 집에서 궤를 가지고 나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는 잘못을 범했다. 수레는 웃사와 아히요가 몰았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방법이 있어음에도 (제사장들이 자문을 해 주었을 것인데) 편리함에 따라 수레에 싣고 출발한 것이다. 하나님의 궤는 새 수레에 싣기 위해 가져 나올 때처럼 메어서 옮겨야 했는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궤가 실린 수레를 따라가며)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궤를 실은 수레가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수레를 끄는 소들이 갑자기 뛰어, 하나님의 궤가 흔들려 떨어지려고 하자 수레를 몰던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고 말았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웃사를 치셨고, 웃사는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
이 일로 다윗도 노했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사와 다윗이 노하여는 같은 단어를 쓴다. 얼굴이 붉어졌다는 의미다. 창피를 당했다는 의미다. 음 그러니깐 웃사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펴서 댄 것은 하나님을 창피하게 만들었다는 뜻이 된다.
사관은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다’라는 표현을 두번 반복한다. ‘손을 펴다’는 권능을 행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향해 손을 폈다는 것은 밑에 사람이 윗사람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의도치 않은 웃사의 손놀림이 웃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
이 일로 다윗은 두려움에 빠져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 오는 대신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갔다. 하나님의 궤는 오벧에돔의 집에서 석달동안 방치되었는데 주님께서 오벳에돔의 가족과 소유에 복을 주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겨 오고자 했을 때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않았다’ 라고 했다. 그럴듯 해보이지만 하나님의 궤를 우상화 한 것이다. 다윗은 목동시절부터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으로 감동된 후에도 하나님과 대화(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궤가 없어서 하나님께 묻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었다. 한마디로 선한 의도가 아니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하던(는) 사람이었다. 그런 다윗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참모들과 의논하고 제사장들의 자문을 받고 백성들의 찬성을 받아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것은 전시행정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의 불순한 행동에 벌을 내리신 것이다. 웃사를 치셨지만 다윗을 얼굴이 벌게 지도록 창피를 당하게 하셨다. 다윗의 노는 자신의 창피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선한의도와 잘못된 방법’이 아니라 다윗의 불순한 의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사건이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시다.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우리의 리더쉽은 많은 사람의 동의나 찬성에서도, 성경에 손을 얹고하는 선서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은밀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묻는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나온다.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