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7,8

잇사갈 베냐민의 아들들은 이름과 함께 용사, 우두머리, 큰 용사, 용감한 장사 라는 토가 달린다. 대대로 무관의 집안이었나보다. 아니면 사관이 이들 지파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기록이 국방부 병적부(병역기록) 밖에 없어서였든가.

납달리의 아들들은 달랑 한줄밖에 없다.

므낫세의 아들들의 명단도 간단하다. 에브라임 아들들 족보에서는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고자한 엘르앗이 가드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한 내용이 포함된다. 다른 족속에 대한 탐욕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관은 에브라임이 이 일로 여러날 슬퍼했다고 기록한다. 에브라임은 아들 엘르앗 사건으로 슬퍼했으나 딸 세에라가 벧호른 우세세에라 두성을 건설한 사건을 기록함으로 슬픔에서 회복했음을 암시하는 기록을 추가한다. 그리고 모세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가 에브라임이 슬픔중에 낳은 브라아의 가문에서 태어났음을 밝힌다.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8장에 들어서 베냐민의 족보가 다시 나온다. 7장에서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여디아엘 세사람이며’ 라고 했는데, 8장에서는 ‘베냐민이 낳은 자는 맏아들 벨라와 둘째 아스벨과 셋째 아하라와 넷째 노하와 다섯째 라바이며’ 라고 첫째 벨라의 이름만 같고 다른 아들들은 이름도, 아들의 수도 다르게 나온다. 다른 책도 아니고 같은 책에서 이어지는 장에서 이렇게 다른 족보를 기록한 사관의 의도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앞에서는 아마도 큰 용사라는 것을 운운한 것으로 보아 군대 조직에 관련된 사람만 적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도 이름이 다른 것은 어찌 이해해야 할지. 베냐민의 첫째 벨라의 아들들의 이름과 수도 7장과 8장은 많이 다르다.

하여간 사관이 8장 (40절) 전체를 베냐민지파의 족보에 할해한 것은 아마도 이스라엘 첫번째 왕 사울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된다.

역대상 5,6

오늘도 족보 2장을 읽어야 한다. 분량도 어제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 첫두절부터 생각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렵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목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정리하면 태어난 순서로는 르우벤이 장자다. 출애굽 후 집안을 일으켜서 왕가를 이룬 것은 유다다. 그렇지만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된 자는 요셉이다.

태생의 순서도 중요하다. 신명기에 보면 사랑하는 자의 아들에게 함부로 장자권을 주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한다. 미움받는 자의 태생적 장자에게 두배로 상속하라고 명하신다.(신21:16,17)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태생의 순서에 따라 장자권이 있다고 하지도 않으신다. 이삭도 형 이스마엘이 있었고 이삭이 태생의 순서에 따라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했지만 막으셨고 요셉도 두 아들을 태생의 순서에 따라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게 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태어난 순서를 보면 알 수 있는 듯 하여도 순서가 다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장자의 명분이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되었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받을 때 요셉은 물론 형제들보다 뛰어났고 주권자였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장자권의 이유는 아니었다는 뜻이리라.  요셉이 두배로 (두 아들이 열두지파에 포함되는) 상속을 받았다는 것에서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있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대에 가면 결국 유다를 통해 예수님이 오신다. 그러니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

태어난 순서가 아니라면, 세상에서의 뛰어남과 주권자가 아니라면 장자의 명분은 결국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주어진다. 이렇게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신다. 전 인류의 장자의 명분을 예수님이 가지신다.

3절은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라고 시작한다. 태어난 순서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5장 마지막은 (18-26절) 단순 족보가 아니라 요단 동편을 차지했던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의 절반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두지파 반이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을 때 승전하고 그 땅을 차지하고 살았지만, 그 땅을 차지한 후에 하나님께 범죄하여 그 땅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앗수르에 의해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가로 쫓겨났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족보에 이런 내력을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교훈을 전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6장 레위의 족보는 더 기네.

역대상 3,4

이어지는 족보. 더군다나 2장 분량.

오늘은 주석이 가장 길게 달린 4장 8,9절 야베스만 주목하기로.

“야베스는 그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게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새번역)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결과가 무엇인가? 야베스가 형제들보다 귀중한 자가 된 것이다. 새번역은 존경받는 자 공동번역은 세력있는 사람으로 번역한다. 야베스는 이름 그대로 고통가운데 태어났다. 야베스의 어미니가 겪은 산고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어머니가 겪는 산통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개인적인 적용은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슬프게 시작한다.

그런데 가장 존귀한자, 존경받는 자, 세력있는 자가 된 것은 또한 무슨 이유인가?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간구를 이루어주신 결과라고 한다. 야베스가 구한 것의 핵심은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가 아닐까? 우리 눈은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주시고’에 꽂혀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죄 가운데 태어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것은 구원말고 또 무엇이 있으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는것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야 말로 형제들 중에서 존귀한 자, 존경 받는 자, 세력있는 자가 되는 길이 아닐까?

야베스의 기도를 개인적으로 적용한다면 지경이 넓어지는 복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는 것일 것이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소서는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역대상 2

남의 족보를 따라가는 것만큼 지루한 일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족보외에는 성경의 기록에 다시 언급되는 일도 드물다.

오늘은 이스라엘(야곱)의 열두아들의 족보가 이어진다. 열두아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다윗이 속한 유다의 아들들부터 적어나간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했다. 처음부터 순혈주의에서 벗어난 족보다. 물론 수아에게서 난 에르 오난 셀라의 가계는 자신의 대에서 끝난다. 당연히 족보에서 파내어야 했을 유다의 맏아들 에르( 창세기에서는 엘)에게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다’ 라는 주석을 덧붙인다. 한술 더 떠 아이성 패전의 빌미간 된 갈미의 아들 아갈(여호수아서에는 아간)의 이름도 빼지 않는다. 아갈에게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 라는 주석이 붙는다.

사무엘상에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아버지 이새의 여덟명의 아들 중 막내였다고 기록하는데 역대상에서는 다윗을 일곱번째라고 적는다. (한명은 족보에 올리기 전에 일찍 죽었던 모양이다.)

세산의 경우 아들이 없었지만 애굽종 야르하라를 우리식으로 하면 데릴사위로 삼아 대를 이어간다. 한마디로 유다는, 다윗가문은 순혈주의는 아니다. 족보에 이름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다윗의 증조부 보아스는 모압여인 룻을 아내로 맞았고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은 여리고 여인 라합과 결혼해서 보아스를 낳았다. (유다때부터 통혼이 전통인 집안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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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야곱)의 열두 아들의 족보다. 처음으로 다윗이 속한 유다가 언급된다. 유다의 후손도 당대에서 가계가 끝난 에르와 오난과 셀라를 족보에서 파내지 않고 언급한다. 이들 셋은 유다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유다와 이방여인과의 결혼은 후대에도 이어진다.
 
오늘 족보에는 이름이 없지만 살몬이 여리고 성 라합을 아내로 맞았고 보아스는 모압여인 룻을 아내로 맞는다. 세산은 아들이 없자 종이었던 애굽사람 야르하라를 우리식으로 하면 데릴 사위로 맞아 대를 이어간다. 혈통적으로 순수하지 않다.
 
유다의 첫째아들 에르(엘)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다’ 라는 주석을 달렸다. 아이성 전투의 패전의 빌미가 된 갈미의 아들 아갈(아간)에게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라는 토가 달렸다. 영적으로도 순수하지 않은 집안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역대상 1

정확히 기억은 아니지만 선배 한분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지 미래가 아니라고 했다. 과거를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과거에 대한 바른 해석과 반성과 그에따른 적용에 따라) 다가올 미래가 달라진다는 요지였을 듯. (담에는 메모로 남겨야 겠다.)

역대상을 펴니 족보로 시작한다. 안동권씨 족보도 안보는 시절에 남의 족보를 봐서 뭘하겠는가? 그런데 한 나라의 족보가 아담에서 시작한다. 사람(아담)의 족보라는 선언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족보를 창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들의 왕조를 창조와 연결한다. 나름 과거를 다시보려고, 바꿔보려고 (과거청산을) 시도한 것이리라.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 라고 기록하고 (28) 이스마엘의 족보도 포함시킨다. 이삭의 아들, 이스라엘의 형 애서의 족보도 끌어안고 에돔 왕들도 (족장들도) 기록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기간 동안 민족의 신으로만 섬겼던 야훼 하나님(신)을 창조주 하나님(신)으로 새롭게 보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성부 하나님을 기독교라는 종교의 신으로 가두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된다. 성자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을뿐 아니라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무엇보다도 성자 예수님도 창조주 하나님(신)이 아니신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7) 바울의 기도처럼 제가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소서. 보혜사 성령이여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