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5 (1-8)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요즘 정말 반복되는 이 표현이 나를 설레게 한다. 심판의 말씀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포도나무는 목재로 쓸 수 없다고 하신다. 불쏘시개나 땔감이 될 뿐이라고 하신다. 목재로 쓸 수 없고 불쏘시개나 땔감 밖에 안되는 포도나무가 만약 불살라진다면 그때는 아무소용이 없다고 하신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을 바로 불쏘시개와 땔감으로 타버릴 포도나무가 되게 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포도나무처럼 불사르실 때에야 심판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줄 알것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포도나무를 불쏘시개와 땔감으로 불사르시듯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하시는 이유를, 포도나무가 목재로서의 가치가 없듯이 예루살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범법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지적하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주변 가지들을) 손질하신다.” 포도나무의 나은 점은 무엇인가? 당연히 목재가 아니다. 포도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임마누엘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 버려져 불쏘시개나 땔감이 된다. 열매 맺는 가지를 방해하는 옆가지도 잘라 버려져 불쏘시개나 땔감이 된다. 나무에 붙어있어도 수액을 빨아들이지 않는 가지는 말라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와 함께 있어도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가지라면  손질을 받을 것이다. 수액을 빨아들이지 않는 것도 다른 가지가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것도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처럼 마:23:13) 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쓸모없는 가지다. 잘라 버리신다. 모아 불에 던져 태워버리신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던 시기 예루살렘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요, 열매 맺는 다른 가지를 방해하는 가지였다. “그들이 범법함이니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예수님께서 친히 포도나무가 되어주신다는 것이다. #임마누엘.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을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재해석하신다. 내가 친히 너희를 위해 목재로써는 쓸모없는 그 포도나무가 되어주겠다. 너희는 내게 붙어서 (열매 맺는) 가지가 되어라. 은혜다.  열매는 결과물이 아니라 ‘전과정’이다. 임마누엘의 삶이다. 불쏘시개나 땔감으로 사라질 인생을 다른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포도열매를 맺는 영원한 삶으로 바꿔주신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의 포도나무시고 나는 그분의 가지다.

에스겔 14 (1-23)

// 13장은 몸이 아파 읽기만 하고 기록은 못했다. 거짓 선지자, 허탄한 묵시나 복술로 백성들을 사냥하는 자들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심판의 목적은 반복된다. 내가 하나님인 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에스겔 앞에 나아왔다. 8장에서는 유다 장로들이 에스겔 집에 찾아왔는데 (분위기상 여러명이 민족적인 문제로) 오늘은 두어 장로만 (아마도 개인적인 문제로) 나아왔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이 두어 장로는 우상을 마음에 들인 자들이고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둔 자들이라고. 하나님께서 이런 그들에게 아무것도 응답하시지 않겠다고 하신다. (약 1:6-8) 대신 이들에게도 심판의 말씀을 전라하고 하신다.

이들 두어 장로는 에스겔에게 나아왔지만 거짓 선지자들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다를게 없다고 하신다. 하나님을 우상취급하는 자들이요 죄를 짓게 하는 것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여기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우상의 수효대로 갚으시겠다고 하신다.

우상은 하나님을 배반하게 한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이유다. 이런 그들은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이다. 그래도 주님은 기회를 주신다.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지내는 이방인에게 차별이 없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마음에 들여 죄를 짓고자 하면 하나님의 백성가운데서 끊어지게 될 것이다. 심판의 목적은 하나님이신줄 알리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인줄을 너희가 알리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알라고 하시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의 꾐에 빠졌더라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 거짓 선지자나 거짓 선지자에게 나아가는 자나 다 자기 죄악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는 미혹되어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사람들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불법을 행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심판하실 것을 예로 드신다. 기근으로 심판하실 때 노아 다니엘 욥 세사람이 그들 중에 있다면 이 세사람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 생명만을 건질 것이라고 하신다. 불법의 나라를 황폐하게 하실 때에도 이 세사람만 건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자기 자녀도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구원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칼로 심판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전염병으로 심판하실 때도 동일하다.  // 그나저나 다니엘이 대단하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다고 노아와 욥과 자리를 나란히 하다니… 하나 더, 이 세사람 모두 이스라엘 땅이 아닌 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공의를 행했다는 것. 음~ 다니엘만 유다 사람이고 노아와 욥은 히브리 사람 이전 사람.

하나님은 이 기근과 황폐케 됨과 칼과 전염병을 동시에 예루살렘에 내리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결국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불법을 행하는 어떤 나라요, 범죄한 어떤 나라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가운데서 노아 다니엘 욥처럼 피하는 자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들을 ‘자녀’들이라고 부르신다. 이들을 구원함을 통해 범죄함에서 돌이킨 자들을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재앙을 통해 하나님을 알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유없이 재앙(심판)을 내리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알라고 하신다.

에스겔 12:17-28

주님은 또 말씀하신다. 에스겔에게 떨면서 음식을 먹으며 놀라고 근심하면서 네 물을 마시라고 하신다. 포로로 잡혀온 백성들에게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이 처한 상황을 상징행위로 보이라고 하신다. 쉽게 말하면 포로로 잡혀온 것이 예루살렘에 남아 근심하면서 음식을 먹고 놀라면서 물을 마시다가 자신들의 포악함으로 결국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 땅이 황폐해 지는 것을 목도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순종하라는 것이다. // 예루살렘의 패망은 정해진 것이다. 굳이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 땅의 폐망을 예언하는 것은 사로잡혀 온 사람들에게도 남아 있는 잘못된 성전신앙, 곧 하나님의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잘못된 믿음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곳이 곧 성전임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주님은 또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난 세월동안 주님의 환상이 이루어진 것을 본적이 있느냐?’ 라는 속담이 어찌됨이냐고 물으신다.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이상 이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심판의 날과 묵시, 곧 하나님 말씀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말씀대신 높아진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의 말씀이 더디지 않고 속히 응하겠다고 하신다. 너희 생전에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겠다고 하신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주님은 거듭 거듭 말씀하신다. 주님의 묵시는 반역의 이스라엘 족속이 생각하듯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주님의 묵시는 한 말씀도 더디지 아니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 포스트모던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도 묵시는 사라지고 있다. 주님은 교회의 몰락을 통해서라도 교훈을 배우게 하실지 모를 일이다. 주님은 거듭 거듭 말씀하시는데…

에스겔 12:1-16

심판의 말씀이지만 끊임없이 주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직까지는 듣는 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없다면 말씀은 희귀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온 사람들도 반역하는 족속이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에 남아 반역하는 자들보다 나을게 없다는 뜻이다. 이들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니 반역하는 족속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행위를 시연해 보이라고 명하신다. 혹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에스겔의 행위를 보고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신다. 성문을 지나서가 아니라 성벽을 뚫고 야반도주해야 하는 자들처럼 얼굴도 들지 못하고 포로로 잡혀갈 예루살렘의 운명을 상징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라고 하신다. 에스겔은 순종했다.

다음날 하나님은 다시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곧 반역의 족속이 에스겔에게 에스겔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거든 에스겔의 행위가 예루살렘 왕과 그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묵시라고 대답하라고 알려주신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도 포로로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유다) 사람들과 왕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한 밤에 얼굴을 가리고 성벽을 뚫고 도망하겠지만 결국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하신다. 올무에 걸린 먹이감처럼 바벨론에 끌려갈 것이고 (왕은) 다시는 땅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열왕기하 사관은 바벨론 군사들은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빼고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갔다고 기록한다. 왕을 호위하는 모든 군대도 에스겔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처럼 시드기야를 떠나 흩어졌다.  심판은 목적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계시하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남은 자들 몇 사람을 남겨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서 벗어나게 하신 은혜를 베푸신 것도, 남은 자들이 자신들이 한 일을 자백하는 (회개하는) 모습을 이방인들로 보게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신 줄 알리신다. 심판과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신다.

음. 이제는 말과 혀로는 안통한다. 진실한 행동이 필요하다. 특별히 교회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그러하다. 하물며 선교지에서의 삶이랴.

에스겔 11:14-25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한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라 예루살렘은 이제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고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에게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게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라라’ 라고 전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잠깐 (즉 포로로 흩어져 있는 동안) 그들에게 성소가 되시겠다고 하신다. 임마누엘이다. 즉 성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다. 성전에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 성소다. // 교회당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다. 흩어진 가나안 성도들에게도 성소가 되어주신다.

또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회복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다. 그런데 회복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땅을 다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들을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다. 대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마음, 새 영으로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되고 순종하는 자들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선언하신다. 한편으로 미운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행위대로 갚으시겠다고 하신다. // 교회당에 남겨진 성도나 가나안성도나 그 행위대로 심판받는다. 성령에 이끌리어 순종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에스겔은 그룹들이 (네 생물이) 날개치며 하나님께서 영광가운데 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루살렘에서 떠올라 성읍 동쪽 산위에 머물렀고 에스겔은 주의 영에 이끌리어 예루살렘에서 환상을 다본 후에 다시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돌아왔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일을 말했다. //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했을 것이다. 심판의 두려움과 회복의 소망이 교차되었을 것이다. 포로지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성소가 되어주신다는 말씀은 힘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위로의 메시지다. 성령에 이끌리어 순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