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1-15

에스겔이 발견한 두루마리 책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글이 안팍으로 가득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너 사람아’라고 부르시며 두루마리 책을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두루마리책에 기록된 것을) 말하라고 명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도 살아야 한다.)

에스겔은 입을 벌렸고 하나님은 그 두루마리의 말씀을 떠먹여 주셨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 얼마나 썼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두루마리의 말씀을 입에서 토해내지 말고 배에 넣으며 창자에 채우라고 하셨다. 에스겔은 받아 먹었다. 순종해서 받아 먹으니 두루마리 말씀이 입에서도 꿀같이 달았다고 에스겔은 고백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었다는 것은 말씀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는 뜻이다. 즉 말씀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그것도 배부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먹어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하셨다. 에스겔은 자신이 이해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민족의 언어로 번역해서 전할 필요가 없었다. 동족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부르게 먹고 소화시켰으니 자기 민족의 언어로 잘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이방 나라에 에스겔이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그들은 정녕 에스겔의 말을 들었을 것이라고 하신다. 반대로 이스라엘 족속은 충분히, 아니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을 듣고도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에스겔의 말을 듣고자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다. 철면피를 하고 아예 듣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얼굴을 더 두껍게 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다시한번 에스겔에게 강조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귀로 들으라고. 그리고 나서 포로중인 이스라엘 민족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다. 에스겔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서 들리는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네 생물들이 날개를 서로 부딪히며, 네 생물들 곁의 바퀴가 굴리며 소리를 증폭해서 들려주었다.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 보자로부터 나오는도다.” 그러나 에스겔은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늘보좌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의 힘이 에스겔을 감동시켰다. 에스겔은 순종하여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 그발 강가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갔다. 처음 일주일동안 에스겔은 그들 가운데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두려워 떨며 지내야 했다. 성령으로 이끌려 보냄을 받았지만 에스겔은 두려워 떨었다고 고백한다.

마음의 귀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말씀을 먹으라고 하신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떠먹여 주시고 보혜사 성령께서 소화까지 시켜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면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에스겔을 위로하시고 힘을 불어넣어 주실까?

에스겔 2 (1-10)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에스겔은 듣는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일어나서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랴. 하나님은 성령으로 에스겔과 함께 하사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신다.

하나님은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 곧 패역한 백성,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을 향해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신다.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들처럼 하나님께 범죄한 상태라고 선언하신다. 얼굴이 뻔뻔하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백성이요 마음도 굳은 자들이라고 하신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에스겔을 보내셔서 말씀하신다. 그들이 패역한 족속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적어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여전히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리라고 하신다.

(이렇듯) 선지자의 삶은 쉽지 않다. 가시와 찔레와 함께 하는 삶이요 전갈 가운데 거주하는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가시와 찔레 전갈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의 대꾸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패역한 족속의 말도, 그들의 뻔뻔한 얼굴도 두려워말라고 하신다. 다만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 먹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손을 에스겔을 향해 펴시고 말씀의 두루마리를 펴보이신다. (패역한 족속을 향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안팍으로 (빼곡하게)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 기록되었다.

// 패역한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위로와 용서의 말씀이 아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다. 다시말해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게 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고후 7:8-11 새번역)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겠지만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을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라도 은혜의 말씀인 것이다. 복음인 것이다. 세상복만 떠드는 것이 오히려 재앙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선지자도 선교사도 안팍으로 빼곡히 적힌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을 복음으로 전해야 한다. 쉽지 않다.

 

 

에스겔 1:15-28

네 생물은 영의 움직임에 따라 번개 모양같이 (빠르게) 왕래했다. (14) 에스겔은 네 생물이 번개처럼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이유를 바로 네 생물에 달려 있는 바퀴라고 설명한다. 도무지 연상이 되지 않는다. 네 생물 옆 바닥에 바퀴가 달려있다고 하는데… 곧은 다리에 달린 것도 발바닥에 달린 것도 아니고 머릿속에 깨끗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구조도 바퀴 안에 바퀴가 들어있는 것 같다고 하는데… 하여간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방향을 돌이키지 않고도 갈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또 높은 바퀴 둘레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그 모양이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둘레가 높고 무섭고 눈이 가득하다는 묘사를 어찌 이해할꼬. 네 바퀴는 네 생물이 타고 다니던 킥보드였나. 생물이 나아가면 바퀴들도 나아갔고 생물이 점프하면 바퀴도 점프했다고 한다. (아뭏든 중요한 것은) 네 생물은 영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고 네 바퀴는 네 생물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결국  네 바퀴, 네 생물은 가운데 임재하는 영에 의해 움직였다.

에스겔은 네 생물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하늘)의 형상을 보았다. 하늘은 눈이 상할까봐 보기 두려울 정도로 (눈이 부시도록) 수정같이 환하게 빛났다고 한다. 수정 같이 환한 하늘 밑에서 네 생물은 두 날개 서로를 향해 펴고 나머지 두 날개는 자신들의 몸을 가렸다. 네 생물이 움직일 때 날개(치는) 소리가 많은 물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하나님의 음성같았다고 한다. 보좌위에서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고 한다. (날개를 치는 것은 날기 위해서가, 즉 움직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날개짓에 의해서가 아니라 네 바퀴로 굴러간다.) 또 날개치는 소리, 많은 물소리는 네 생물의 찬양소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다. 따라서 날개치는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증폭하는 스피커의 역할이다.

네 생물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는 보좌의 형상이 있다고 한다. 이곳으로부터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그 보좌의 형상위에 한 사람의 형상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니 그 보좌위의 형상은 분명 하나님의 형상일 것이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는 없다. 상반신도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하반신도 불꽃속에 있으며 그 광채가 사방으로 빛났다고 한다. 그 광채를 무지개 같다고 한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한다. 그래서 에스겔도 무지개 같은 광채를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라고 이해했다. 에스겔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 하늘 보좌 위에서 많은 물소리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보좌에 있는 네 생물은 일사불란하게 하나님의 음성,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많은 물소리는 네생물의 찬양소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증폭해서 들려주는 스피커 소리다.) 네 생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네 바퀴까지 옆에 항상 대기 시켜두었다. 하늘에서는 주님의 뜻이 이처럼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주님은 이땅에서도 성도들이 번개처럼 빠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에스겔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빠르고 온전한 순종을 기대하심을 ‘네 생물과 네 바퀴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의 환상’을 통해 보여주셨다. 나에게도 에스겔처럼 엎드려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성령하나님을 통해 깨닫게 하심에 순종하라고 하신다.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우리에게 주어진 네 생물과 네바퀴가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순종을 위해 중보하신다. 나에게는 희미한 환상이 아니라 말씀이 가르쳐 주는 좀 더 분명한 진리다.

에스겔 1:1-14

서른째 해 넷째 달 초 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자신에게 보인 때와 장소를 분명하게 기억한다. 혹시 ‘때’를 잊을까 하여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사로잡힌 지 오년 그달 초닷새라고 환상을 본 ‘때’를 이중적으로 기록한다. 장소도 갈대아 땅, 곧 바벨론의 그발 강가라고 명확히 한다.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제사장이라고 직분을 소개한다.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를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고 스스로 주석을 단다. 그리고 자신이 본 환상을 기록한다.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온다 – 노아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떠오른다.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인다 –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 나무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떠오른다. 에스겔은 하나님을 심판의 때에 자신을 부르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을 바로 보는 것은 아니다. 에스겔이 보는 것은 사람과 비슷한 네생물의 형상이다. 사람과 비슷하나 네 생물은 얼굴이 네개, 날개도 넷씩 있으며 곧은 다리를 가지고 있다.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같이 빛난다. 네개의 날개 밑으로는 사람의 손이 있다. 에스겔은 날개는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날개짓을 하지 않고 네 날게 모두 가는 방향으로 곧게 행한다고 묘사하는데 아마도 날개짓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글라이더 처럼 바람을 타듯이 움직인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리라. (뒤에 보면 날개짓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네 얼굴은 앞은 사람의 얼굴, 오른쪽은 사자, 왼족은 소, 뒤는 독수리의 얼굴을 가졌다고 묘사한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두 날개를 펴서 서로 서로 맞잡고 두 날개로는 몸을 가렸다고 묘사한다. 네 생물은 ‘영’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한다고 묘사한다. 에스겔은 네 생물을 (사람의 형상이라고 앞에서 말했는데) 숯불과 횃불 모양 같다고 덧붙인다. 네 생물사이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모습, 영광의 광채가 충만한 모습을 묘사한다. 번쩍이는 번개로 하나님의 위엄을 묘사한다. 네 생물은 영이신 하나님의 움직임에 (뜻에) 따라 번개같이 즉각적으로 순종한다.

나이 서른에 제사장직을 맡은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보여 주셨다. 태평시절이 아닌 포로시절에, 자기 나라가 아닌 감옥과 같은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임하셨다. 그러나 얼마나 희미한가?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네 생물(천사?) 가운데 임재하시는 광풍과 번개로 밖에 묘사될 수 없으셨다.

그러나 에스겔 후 이천사백여년 후 주님이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사람들 사이에 나타내셨다. 물론 이때도 평안의 때가 아니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다. 지체없이 순종하라고 하신다. 지체없이 순종할 때 주님은 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임재하신다. #임마누엘.

세상은 지체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볼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다. 자기 잘났다고 자기 의만 드러내는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세리의 기도가 필요한 때다. 선교지에서도 마찬가지다. …

 

 

데살로니가후서 3: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들아~~’ 하고 부를 수 있는 지체가 있는 것은 기쁜 일이다. 위로만이 아니라 훈계하고 명령을 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되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런데 분위기 썰렁하게 바울은 형제들에게 게으른 자와 바울이 가르친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형제들에게서 떠나라고 명한다. 형제에도 두 부류가 있다니. 우리는 아직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형제라고 불러도 다른 길을 가는 형제에게서 떠나야 한다. 떠나라는 의미는 조심해서 똥을 밟지 말고 피하라는 뜻이다.

불순종의 형제를 떠나는/피하는 방법은 바울의 가르침을 본받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자신들이 어떻게 순종의 본이 되었는지 떠올리게 한다. 먼저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말해 일관성 있게 일했다.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폐를 끼지치 않았다. 복음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공짜 밥을 요구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스스로 먹고 살았다. 바울 일행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말씀을 배우는 자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받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권리를 누리는 것보다 스스로 자족하는 것이 더 나은 본이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수고해서 먹을 것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바울일행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으면서 이미 본을 보였다. 심지어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데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게으르게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스스로 일해서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다시 명한다. 게으르지 않다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선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선한 일은 착한 일이다. 주로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는 일을 가리킬 때가 많다.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사귀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봄으로 불순종하는 자들을 창피하게/부끄럽게 만들라고 명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때까지 그들을 원수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고 한다. (원수들에게도 그들이 얼굴이 벌게 지도록 부끄럽게 하기까지 선을 행하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주님은 평강의 주님이시다.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다. 임마누엘의 주님이시다. 모두가 형제가 되어 이 평강과 임마누엘을 누리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바울은 친필로 이 편지를 쓴다. 싸인까지 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명령할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한 대로 살아갈 것을 약속하는 의미심장안 표현이 아닐까? 형제에 대한 권면은 형제를 세우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로 세워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함께 지어져 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임마누엘은 은혜로만 누릴 수 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