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18:1-10

회막이 길갈에서 실로로 옮겨졌다. 분명 길갈에서 제비뽑아 땅을 분배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14:6) 땅분배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여간 가나안 대부분의 땅이 정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일곱지파였다. 열두지파중 르우벤, 갓, 동편 므낫세 반지파, 유다, 에브라임, 서편 므낫세 반지파에게만 땅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졌다.

여호수아는 일곱지파에게 주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언제까지 지체하겠느냐고 책망한다. 그리고 각 지파에 세사람씩 선정해서 가나안 땅을 두루다니며 땅을 그려오라고 명했다. 요단 서편에서 유다와 요셉 자손이 차지한 땅을 제외한 부분을 일곱부분으로 나눠 일곱지파에게 제비뽑아 분배하겠다고 한다. 다시한번 레위지파는 기업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땅이 아니라 제사장 직분이 레위사람들의 기업이 될 것이라고 한다.

각지파별로 세명씩 요단 서편 땅을 두루다니며 분배받을 땅을 그려, 일곱부분으로 나눈다음 실로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돌아왔다. 여호수아는 실로의 주하나님 앞에서 제비를 뽑아 이스라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했다.

// 일곱지파에 대한 땅분배에 대한 서론이다.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이 길갈에서 실로로 옮겼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자신이 속한 에브라임지파가 분배받은 땅의 중앙인 실로로 회막을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절반이 넘는 일곱지파가 땅을 분배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말이 분배지 가나안 땅은 (약속에 따라) 점령해야 할 땅이었고 일곱지파에게는 변방지역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또 지파들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었기 때문에 아마도 두려움이 컸던 모양이다. 저들에게는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에서 벌인 무수한 승전의 경험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은 과거의 경험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가나안 정탐때는 각 지파별로 한명씩 열두명이 나갔다. (보통 2인 1조가 아닌가?) 이번에는 각 지파별로 세명씩 내보낸다. 그만큼 가나안 점령에 대한 강한 의지와 긴박성이 엿보인다. 사실 가나안 점령은 주하나님을 따라가는 전쟁이었다. 주님이 앞서 가셔서 가난안 족속을 쫓아내시면 (물론 이스라엘의 심판의 칼로 사용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따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면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앞서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을 차지하라고 주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주하나님께서 저들을 쫓아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오늘도 앞장서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 살라고 하신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우리의 발걸음을 잡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하다. 예수님을 푯대로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면 푯대를 놓치게 된다. 신앙의 미아가 된다.

레위지파에게는 다시한번 땅이 아니라, 이번에는 제사장 직분이 기업이라고 하신다. 땅이 아니라 제사장 직분이 기업이다. 직분이 기업이라는 것은 직분을 살아내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

여호수아 17 (1-18)

에브라임에 이어 므낫세 지파가 분배받은 땅이 기록된다. 사관은 므낫세가 요셉의 장자라고 분명히하고, 므낫세의 장자 마길이 요단 동편에서 길르앗과 바산을 차지했다고 밝힌다. 요단 서편에서는 므낫세의 남은 자손들이 가족대로 제비뽑아 땅을 분배 받았다.

므낫세 자손 중,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는 딸만 있었다.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지도자들 앞에 나와서 주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민 27) 자신들에게도 땅을 분배해 달라고 요청했고 여호수아는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도 땅을 분배했다. 사관은 요단 동편외에 요단 서편에서 므낫세 자손에게 열분깃이 배정된 이유를 므낫세의 여자 자손들이 그의 남자 자손들 중에서 기업을 받은 까닭이라고 적는다.

사관은 이어서 므낫세 자손이 얻은 땅의 경계를 기록한다. 어제 말씀처럼 답부아 땅의 일부와 므낫세와 에브라임 경계의 땅의 일부가 에브라임자손에게 배정되었다. 사관은 앗사갈과 아셀이 분배받은 지경에도 므낫세의 소유가 있다고 밝힌다. (므낫세가 이들이 땅을 정복할 때 도왔기 때문에 얻을 땅인가?)

안타깝게도 므낫세 자손의 땅의 분배도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라고 끝을 맺는다.

사관은 요셋 자손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넓은 땅을 분배받은 후기를 첨부한다. 요셉 자손은 여호수아에게 (약속에 따라 장자의 권리가 있는 자신들이) 한제비 한 분깃만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항변했고, 여호수아는 브리스족속, 르바임 족속의 산지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응대했다. 요셉자손이 산지 주민은 철병거가 있는 강성한 민족이라고 다시 따지자, 여호수아는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 지라도 능히 쫓아 낼 수 있다고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격려했다.

// 여호수아는 므낫세에게 요단 서편에서도 열분깃, 곧 열 몫의 땅을 분배했다. 열 몫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므낫세 반지파 몫이 아니라 므낫세 온지파의 몫을 분배받았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대로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도 땅을 주기 위해서라고 사관은 기록하나 여호수아가 에브라임지파 소속이고 므낫세에게 많은 땅을 분배함으로써 형제 에브라임에게도 더 많은 땅을 분배하기 위해 팔이 안으로 굽지는 않았을까? 라고 삐딱한 시선으로도 읽어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호수아가 요셉자손들이  한 분깃만 배정했다는 항변에 철병거를 가진 산지를 차지하라고 분배한 것으로 보아 용사였던  (형제) 므낫세 지파로 하여금 가나안 정복의 선봉에 서도록 자기가 속한 요셉 자손들의 희생을 독려했다고 볼수도 있겠다.

// 사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 낼 수 있는 일만은 아니다. 시간이 걸린다. 강성해져야 한다. 더군다나 세상은 철병거만큼 강하다. 믿음이 아니면 세상의 철병거를 이길 수 없다. 그런데 믿음이란 무엇인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힘이다. 유다지파의 갈렙처럼, 오늘 본문의 슬로브핫의 딸처럼, 요셉의 자손들처럼 약속에 근거하여 사는 삶이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고 산다면 세상은 결심하고 성도들을 괴롭힐 것이다.

세상의 철병거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우리의 순종이다. 바울은 우리 (성도) 들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들을 이길 수 있다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온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모든 복종하지 않는 자를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고후 10:5,6 새번역)

내가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세상의 철병거를 이길 수 있다.

여호수아 16 (1-10)

1-4절은 요셉 자손이 제비뽑아 얻은 땅에 대한 기록이다. 요셉 자손은 (약속대로)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지파의 몫을 기업으로 받았다.

5절부터는 에브라임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지역을 열거한다. 특이한 점은 므낫세 자손의 기업중에서도 에브라임 자손을 위해 구분한 성읍과 마을이 있었다는 것이다. (에브라임이 므낫세에게 분배되어야 할 성읍과 마을도 배정받았다는 의미같은데… 음 동편 땅을 분배받은 므낫세 반지파 몫인가?) 또한 유다지파처럼 에브라임도 분배받은 땅 중에서 완전히 차지하지 못한 땅이 있었다. 사관은 에브라임 지파가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고 에브라림 가운데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

// 여호수아는 여기서 실패한 것 같다. 지도자로서 팔이 안으로 굽었다. 서쪽 므낫세 반지파까지 계산하여 자기가 속한 에브라임 자손에 땅을 더 분배한 것이나, 자신을 속인 기브온과 화친을 맺어 기브온을 종으로 삼은 잘못에 대해 (주하나님께서 별다른 징계를 하지 않으시자 ) 게셀 주민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에브라임 자손의 종으로 삼은 것은 지도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관된 원리를 가지고 있지만 적용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것은 쫓아낼 힘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해 쫓아내기 않았다는 것이 흐름상 더 맞는 것 같다. 에브라임은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기브온 주민처럼 노예로 부리면 된다는 잘못된 적용으로 완전히 쫓아내지 않았다. 그러나 가나안 족속은 진멸의 대상이었다. 완전히 쫓아내야 했다. 주하나님께서 친히 쫓아내시겠다고 (쫓아낼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게셀주민을 노예로 삼을 정도면 분명 진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에게는 주하나님의 (아마도 일시적인) 긍휼이겠지만 에브라임 자손은 자신들의 편리를위해 분명 불순종한 것이다.

나의 일관성을고집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훼손해서도 안되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팔이 안으로 굽어서도 안된다. 지도자라면 특히 더 그렇다. 같은 말씀이라도, 비슷한 상황이라도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여호수아 15 :20-63

유다지파가 가족대로 받은 땅이 열거된다.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만큼 많은 성읍과 마을들을 분배받았다. 그러나 서편 해안가의 블레셋이 차지한 비옥한 땅을 비롯하여 많은 땅을 아직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수 13:3)

사관은 마지막 절에서 예루살렘을 그 예로 든다.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 유다자손부터 분배받은 땅을 온전히 차지하지 못했다. 여전히 차지해야 할 분배받은 땅이 있었다. 주하나님께서 쫓아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갈렙처럼 온전히 주하나님을 좇아 순종해서 차지해야 할 땅이다. 예루살렘은 후에 다윗에 의해 정복되어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다. 기럇 여부스가 기럇 다윗, 곧 다윗성이 된다 (삼하 5)

우리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를 주로,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땅을 분배받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땅을 차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를 때 가능하다.

그러나 불순종은 천하 예루살렘이라도 심판을 면하게 할 수 없음을 에스겔 묵상으로 배웠다. 불순종은 기럇 그리스돌를 기럇 세상으로 전락시킨다. 육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오늘날의 예루살렘이 그 결과다. 평화를 상징해야할 도시가 분쟁의 도시가 되었다.

참된 안식은 순종으로부터 나온다.

여호수아 15:1-19

유다지파가 제비뽑아 얻은 땅과 경계를 기록한다. 그 사방경계에 속한 땅이 굉장히 넓다는 인상을 받는다. 무려? 12절에 걸쳐 기록한다. 예루살렘 아래쪽을 몽땅 차지하고 시므온과 공유한 것으로 나온다. (지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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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9절은 갈렙이 요구한 헤브론 산지와 드빌을 얻는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다. 갈렙은 헤브론의 원래 이름인 기럇 아르바에서 아르바의 후손 아낙의 세아들 세새, 아히만, 달매를 쫓아내고 이름을 헤브론으로 바꿨다. 소유권 이전등기를 완료했다. 이어서 기럇 세벨도 쳐서 ‘드빌’ 로 이름을 바꿨다.

갈렙이 아무리 아낙 자손을 ‘밥’ 같이 여겼어도 헤브론과 드빌을 다 차지하기에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갈렙이 드빌을 쳐서 점령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옷니엘이 악사를 차지했다. 사관은 옷니엘을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이라고 소개함으로 갈렙가문에 대한 약속의 성취임을 분명히 했다. 그 아버지의 그 딸. 악사는 네겝에 있는 옷니엘에게 출가하면서 윗샘 아랫샘을 결혼선물로 갈렙으로부터 얻었다.

// 기럇 아르바가 헤브론이 되었다. 기럇이 마을 혹은 성읍이라는 뜻이므로 아르바 마을이 헤브론이 된 것이다. 마을 주인이 큰 아낙 아르바에서 갈렙과 갈렙후손들로 바뀌었다.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기럇 용승에 사는가? 기럇 그리스도에 사는가? 자문하게 된다. 성도는 기럇 그리스도에 사는 사람들이다. 기럇 그리스도에 살아야 그리스도 말미암은 은혜의 샘물을 나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