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5:1-12

요단 서쪽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서쪽 해변까지 모든 족속들이 주하나님께서 요단 물을 말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은 것은 당연했으리라. (이들은 요단 동쪽 아모리 족속의 두왕 시혼과 옥의 패망에 이미 넋이 나간 상태였었다.)

(기선제압에 성공했는데 돌연) 주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신다. ‘다시’라는 표현은 한동안 할례의식을 행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했다. (그래서 그곳을 할례 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한 이유는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 1세대는 할례를 받았으나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할례받은 1세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주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지 않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다 죽어야 했다. 이제 할례받지 못한 2세대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멍거지, 곧 할례없는 자의 신분을 벗어나야 했다. (할례 받은 자라도 불순종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 무할례자라도 순종하고 할례를 받으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

모든 백성이 할례를 받고 진중에서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렸다. 모든 백성들이 할례를 받자, 주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곳 이름이 길갈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애굽의 수치란 무엇일까? 주하나님과 관계없이, 즉  주하나님을 모르고 산 삶이다. 불순종으로 주하나님께서 사용할 수 없는 더러운 그릇이었음을 뜻할 것이다. 성도가 세상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수치는 없을 것이다. )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할례의 상처가 낫기를 기다렸다. (대적들에게는 기습하여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저들은 이미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으니 무방비의 이스라엘은 안전했다.) 그리고 십사일 저녁에 여리고 평지(길갈)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 이틀째에 요단  서쪽 땅의 소산물을 먹었다.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부터 만나가 그쳤다고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다.

// 만나가 그친 것은 축복일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주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처음으로 그땅의 소산물을 먹었을 때, 그 소산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다. 주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만나는 ‘잉여’가 없는 양식이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일용할 양식이었다. 탐심이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주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소산물도 탐심없이 만나처럼 분배되길 원하셨을 것이다. 나의 수고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기를 다짐하게 된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시작일지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잉여의 양식으로 공동체 누군가가 굶주리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나가 그쳤다는 문구가 가슴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