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14 (1-15)

요단 서편땅도 분양한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 그리고 각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했다고 한다. 이들은 주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제비뽑아 지파별로 땅을 나눴다. 제비를 뽑았다는 것은 주하나님께서 친히 분배하셨다는 뜻이다. 제사장도 참여한 이유는 레위지파를 위한 거주지와 레위인 소유 가축의 목초지를 분배하기 위해서였다. 레위지파가 분배에 빠졌는 여전히 아홉지파 반에게 분배된 이유는 요셉 자손이 므낫세, 에브라임 두지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친절히 설명해 준다. 여호수아는 여전히 눈의 아들이요, 땅의 분배도 주하나님께서 모세의 명령에 따라 행했다고 기록한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넘사벽이었던 모양이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때부터 천국은 침노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해석하기 정말 어려운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 갈렙이 꼭 천국을 침노하는 자의 전형을 보여주는듯.) 유다 지파는 제비뽑기와 함께 약속으로 땅을 분배받는다. 우선 유다지파 대표로 사십오년전 열두정탐꾼의 하나로 주하나님께 충성했던 갈렙이 여든다섯의 노구를 이끌고 헤브론 산지를 분배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모세는 (주하나님은) 갈렙의 충성에 ‘네가 밟는 땅은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될것이다’ 라고 약속했었다. 약속에따라 갈렙은 아낙사람들이 거주하는 헤브론 산지를 주면 주하나님을 힘입어 (주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아낙자손을 쫓아내겠다고 말한다. 여호수아는 갈렙을 축복하고 헤브론 산지를 분배했고 갈렙은 주하나님을 온전히 좇아 그 땅을 차지 했다. 사관은 갈렙이 차지한 헤브론이 가장 큰 아낙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고 주석을 단다. 그리고 그땅에 전쟁이 그쳤다고 한다. 임마누엘의 결과다.

// 사람들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며 핑계댈 피동적인 제비뽑기를 선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동적인 믿음으로 이땅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약속을 주셨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지않을 때는 제비뽑기가 좋다. 사람의 주관이 하나님의 뜻을 훼방할 여지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할 때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갈렙을 축복함으로, 갈렙은 주하나님을 온전히 좇아 약속을 성취했다. 임마누엘이 전쟁을 그치게 한다.

여호수아 13:15-33

요단 동편부터 땅을 분배한다. 제일 먼저 르우벤 지파에게 기업을 주었다. 분배원칙은 ‘가족을 따라서’였다. 아마도 가족수가 기준이었을 것이다.

21절에보면 르우벤 지파는 헤스본에서 다스리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의 온나라를 차지하게 된다. 사관은 이때까지 언급하지 않던 시혼의 군주들인 미디안의 귀족 에위와 레겜과 술과 훌과 레바를 모세가 시혼 왕과 함께 죽였다고, 그리고 점술가 발람도 죽였다고 언급한다. 르우벤이 물질적으로 문화적으로 풍요롭지만 거짓영으로 가득한 땅을 차지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것 같다

이어서 갓 지파가 분배받은 땅을 열거한다. 갓 지파도 가족대로 분배 받았다.

므낫세 반지파도 요단 동편에서 길르앗 절반과 옥이 다스렸던 바산 땅을 가족대로 분배받았다. 므낫세 반지파의 대표적인 가문이 마길자손이었다고 한다.

사관은 다시한번 레위지파의 기업은 주하나님이심을 끼어넣는다.

// 땅을 분배받는 기준은 간단하다. 가족을 따라서다. 가족대로 받았다. 지파별로 지역이 결정되면 그 지역내에서 가족대로 땅을 받았다. 누가 더 받거나 누가 덜 받지 않았다. 만나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출 16장에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 거두었더라.” 라고 기록한다.

가족대로, 사람의 수효대로, 기업을 분배 받을 때 사람의 지위고하는 고려되지 않았다. 차별이 없었다. 사람들 눈에는 어떤 가족의 땅은 커 보이고 어떤 가족은 작아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남음도 부족함도 없는 분배였을 것이다. 성도들이 받은 은사도 이와같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차별이 없다. 당연히 서로 차별해서는 안된다.

다시한번 레위 지파의 기업을 언급한다. 내가 무엇을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됨에 감사하라고 하신다.

여호수아 13:1-14

여호수아서 사관은 11장에서 여호수아가 오래동안 싸웠고 (18절) 그래서 그 땅에 싸움이 그쳤다(23절) 고 기록했다. 13장은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로 시작한다.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때 여호수아의 나이는 이미 백살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에브라임지파의 대표로 열두 정탐꾼의 하나로 뽑혔을 때 이미 50이 넘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 +) 그러니 늙었다는 표현은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의미보다는 요단을 건넌지 이미 오래 되었다는 11장 18절의 뜻이 강할 것이다. 그런대도 아직 차지하지 못한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고 주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열정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대표적인 남은 땅은 블레셋 사람의 모든 지역과 그술 족속의 모든 지역이었다. 당시의 지도를 펴놓고 보지 않는 이상 감을 잡기 어렵다. 그래서 인터넷에 떠도는 지도의 도움을 받았다. 요단 서편에서는 주로 지중해 해변가 쪽과 요단 동편 갈리리 북동쪽부분을 차지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다. (지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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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주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땅도 이스라엘 아홉지파와 므낫세 반지파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고 명하신다.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나머지 반지파는 요단 동쪽에서 그들의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다.

사관은 모세가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에게 분배한 땅에 대한 상활도 기록한다. 요단 동편에서도 이스라엘 자손은 그술족속과 마아갓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그술족속과 마아갓 족속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했다고 기록한다. (지도상에보면 갈릴리 북동쪽이라 지역적으로 가운데라고 보기는 힘들다.)

사관은 말씀에 따라 여호수아가 레위지파에게는 기업으로 준 것이 없다고 기록한다. 레위지파에게는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하나님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다.

// 주하나님께서는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고 (1절) 하시면서 주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친히 쫓아 내시겠다고 (6절) 약속하신다. 결과적으로 주하나님께서 하시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주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순종해야 얻을 땅이다. 이땅에 사는 우리들도 신앙(교회)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뤄내야 한다. 오랜 신앙생활에도 멈출 수 없다.

// 그리고 엄밀하게 말하면 그술과 마아갓은 요단 동편지역의 족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진멸시켜야 할 족속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하게 나둬서는 안될 족속이었다. 요단 서편에서처럼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뤄내야하기 때문이다.

// 사관은 땅의 분배를 언급하면서 레위지파 이야기를 꺼낸다.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기업으로 받아야 할 것이 바로 주하나님과의 화목, 곧 임마누엘임을 확인시켜주는 구절이다. 땅이 아니라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됨이 하나님나라 백성의 존재 이유가 되어야 함을 교훈한다.

 

여호수아 12 (1-24)

주하나님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단 동쪽에서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쳤고, 모세가 그 땅을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다.

요단을 건넌후 서쪽에서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고 헷,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 족속을 진멸하고 그 땅을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구분에 따라 소유로 주었다. 사관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서쪽에서 진멸한 서른 한 왕을 하나하나 열거한다.

// 사관은 요단 동편 땅을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에게 기업으로 준 사람은 모세요 (6절), 서편 땅을 나머지 지파들에게 구분에 다라 소유로 준 사람을 여호수아라고 구분한다.(7절) 굳이 땅 주인 주하나님 대신 공인중계사인 모세와 여호수아로 구분하여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보유한 부동산 수는 (진멸한 왕의 수는) 31:2로 여호수아가 압도적으로 모세보다 많았다. (고객수도 9.5:2.5였다.) 물론 무의미한 비교다. 그렇지만 모세와 여호수아가 물리친 왕들을 나란히 기록하여 모세의 아류에 지나지 않았던 여호수아를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성경책에 내 업적이 기록되는 것보다 생명책에 내 이름을 올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슨 일을 얼마나 어떻게 했느냐 보다 중요하다. 예수님은 칠십인의 추수꾼들이 돌아와서 자신들이 한 일에 들떠있는 저들에게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눅10:20 새번역)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할 것이라곤 이것 밖에 달리 없다. 주일 아침이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소서.

여호수아 11 (1-23)

가나안 남쪽이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에게 진멸되었다는 소식은 하솔 왕 야빈의 귀에 들어갔다. 하솔 왕 야빈은 마돈 왕 요밥, 시므론 왕, 악삽 왕을 비롯하여 동서남북 사방의 가나안 족속, 아모리 족속, 헷 족속, 브리스 족속, 산지의 여부스 족속, 미스바 땅 헤르몬 산 아래 히위 족속에게 사람을 보내 동맹을 맺었다. 이들 연합군 규모는 어마어마 했다. 동원된 백성이 해변의 모래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다고 기록한다. 이들은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메롬 물가에 모여 진을 쳤다.

가나안에서의 모든 싸움은 주하나님이 군대대장 되신다. 군대대장 주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연합군의 규모에 압도되어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주하나님께서는 내일 이맘때에 주하나님께서 친히 가나안 연합군을 몰살시키시겠다고 하신다.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연합군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사르라고만 하셨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사는 메롬 물가로 선제기습공격을 하자 주하나님께서 가나안 연합군을 격파하게 해 주셨다. 시돈과 미스로봇 마임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미스바 골짜기가지 추격하여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쳐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주하나님이 여호수에게 명한대로 가나안 연합군의 말의 뒷발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살랐다.

하솔이 주도한 가나안 연합군은 이렇게 힘도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했다. 여호수아는 하솔을 잡아 칼로 쳐죽었다. 가나안 연합군에 가담한 모든 사람을 칼로 진멸했다.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솔의 시체는 불태웠다고 한다. 가나안 연합군에 동참한 모든 왕과 성읍도 진멸했다. 주하나님께서 이미 모세에게 명령하셨던 것을 여호수아는 순종해서 수행했다.

사관은 여호수아가 하솔만 불살랐다고 주석을 단다. 아마도 가나안 북쪽지역의 첫 성이라서 요단 첫 성 여리고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전리품이 주하나님의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을 아닐까? 나머지 성읍들은 불사르지 않았고 재물과 가축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전리품으로 탈취했다. 단 사람은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사관은 주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주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고 기록한다. (모세와 달리 여호수아가 여전히 지도력을 의심받았던 것일까? 아니면 말씀의 성취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점령했다. 11장 한장에 달랑 기록되었지만 18절에보면 오랫동안 싸웠다고 기록한다. 가나안에서 히위 족속의 기브온 주민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었다. (다시말하면 화친의 문은 열려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싸움에서 다 이겼다. 주하나님께 범죄하여 주하나님의 심판의 칼인 이스라엘에게 대적한 모든 나라는 은혜를 입지 못하고 진멸되었다. (대적하지 않았다면 은혜의 문이 열려있었다) 주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멸하셨다.

사관은 여호수아가 아낙사람을 멸절시킨 사건도 기록한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에는 아낙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다고 한다. 이와같이 여호수아가 주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나눠 주었다. 그땅에 전쟁이 그쳤다고 기록한다.

// 가나안 정복은 11장을 읽어내려가듯 하루아침에 손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주하나님이 군대대장되어주신 전쟁을 치른 결과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이땅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하나님이 군대대장 되어주시는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여전히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주신다. 우리로 하여금 의의 병기가 되어 이땅에서 살게 하신다.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도,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도, 사도들을 통해 주신 말씀도, 무엇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늘로 살아내야 한다.

가나안 정복을 통해 이스라엘 사관은 ‘전쟁은 너희 (이스라엘) 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라는 교훈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순한 교훈을 잊어버리고 대적의 큰 무리에 두려워하고 놀라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게 된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에서 ‘나’의 전쟁을 싸우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병기’로 싸우는 삶이다. 나의 싸움이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그리고 지속되는 승전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하나님과 화평하는 문은 항상 열려 있다. 은혜의 문은 열려 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이 문구로만 보면 모든 사람은 심판을 받아야 된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은 하나님과 화친을 맺는 은혜의 길이 있다. 좁은문이요 협착한 길이지만 분명 있다. 라합과 기브온이 그 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나도 그 예로 기록되기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점령했다. 끝이 아니다. 이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말씀대로 사는 일이 남았다. 이들에게 주하나님이 더 필요한 이유다.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더 필요한 이유다. 임마누엘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