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7 (1-9)

세상에 발을 담그고

시인은 비참한 가운데 우리를 기억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지 않았던가? 오늘 시인은 비참한 가운데 주님을 기억하며 울며 읊조린다.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 강가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은 강가에 모여있는 포로들에게 한곡 뽑으라고 놀린다. 시온의 노래중 하나를 불러보라고 한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찬송가를 불러보라고 비꼬는 것이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하는 것이다. (시78:10)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의 백성들은 차마 찬송을 부를 수 없었다. 수금을 버드나무에 그냥 걸어둘 수 밖에 없었다. 시온을 생각하며 울 수밖에 없었다.

(울면서) 낯선 바벨론 땅에서 어떻게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시인의 노래는 오직 예루살렘뿐인데. 시온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뿐인데. 예루살렘아 난 너를 잊을 수 없다. 내가 너를 (주님을) 잊는다면 무슨 풍악을 울리랴. 시온에서 형제와 연합하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면 무슨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기타를 벽장 속에 넣어두고 벙어리로 살아가는 게 낫다는 마음뿐이다.)

시인은 주님앞에 고개를 떨군다. 예루살렘 함락을 보고 망해라 망해라 망해라 하면서 기뻐하던 형제 에돔을 벌해 달라고 노래한다.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을 죽음에 몰아 넣은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노래하면서, 바벨론은 씨가 끊어지도록 멸망시키라고 저주한다. // 마치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동족)들을 착취한 자신들의 잘못을, 형제 에돔의 악행과 심판의 칼 바벨론의 포악에 빗대어 뉘우치는 것일까? 자신들이 에돔과 바벨론과 다를게 없었음을 시인하는 것일까? 시인이 하나님은 우리 행위대로 갚으시는 분이심을 잘 알았기에 이렇게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 “Rivers of Babylon”. 자메이카 레게그룹인 멜로디안이 불렀던 이 노래는 보니엠에 의해 7080년대 히트송이 되었다. 이 노래는 착취와 업압과 박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노래로 불려졌다. 솔직히  가사와  상관없이 디스코의 열풍을 타지 않았을까? 그때는 시편의 노래인줄 몰랐는데. 이노래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바라네”라는 시편 19편,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주의 말씀으로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달은 시인의 결론도 담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세상에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님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는데,  정작 우리가 있는 곳은 (사랑의 나눔이 있는) 시온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만 있는) 바벨론 강가가 아닌가.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는 어리석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부를 노래는 무엇일까? 찬양과 경배의 노래보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부르심과 회복을 간구하는 노래를 우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울며 읊조리며 이웃사랑으로 하나님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주님은 바벨론 어느 강가에 있을지 모를 우리(나)에게 다시 시온을(사 11:6-8) 꿈꾸라고 하신다. 바벨론 강가를 시온으로 만들라고 하신다.  행위대로 갚으시는 주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바라네”

7-9절은 바벨론 강가의 이스라엘 포로들이 바벨론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자기네 말로 불러준 노래의 가사가 아닐까? 마치 보니엠이 멜로디안의 애절한 노래를 디스코풍으로 불러냈듯이.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불러야 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도 이웃사랑으로 숨겨야하지 않을까?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