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1-12

하나님의 아신 바 된 은혜

1- 6 주님은 나를 아신다. 공장에서 나를 찍어내셨기 때문에 나의 스팩(사양)을 아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셔서 유니크한 나를 아신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주님은 나의 일거수일투족만 아시는 것이 아니시라 나의 생각도 밝히 아신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깨어있을 때도 잘 때도 나의 모든 행동과 습관을 아신다. 심지어 내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두 다 아신다. 이런 주님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 나와 어깨동무하고 (나를 부축하고) 걸어주신다. 임마누엘! 이 임마누엘의 지식은 오히려 신비라고 해야 맞다. 내가 능히 깨닫지 못하는 신비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필요하다.)

7-12 임마누엘!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문제는 내가 잘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영을  떠나 유리한다. 주님을 찾는 다는 것이 마치 주님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이라도, 아골골짜기라도 내가 있는 곳에 주님은 함께 계시는데. 나는 새벽부터 주님을 찾아 바다 끝까지 날라가본다. 주님은 거기까지 따라오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는데. 나는 때때로 빛되신 주님의 임재를 깨닫지 못하고 흑암에 둘러쌓여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나도 시인을 따라 노래한다. 내가 흑암 속에 있어도 주님은 나를 보고 계신다고. 주님의 나에 대한 사랑은 밤과 낮이 같고 흑암 속에서나 밝은 빛 가운데서도 같다고. (다윗은 주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노래하지만 난 주님을 찾을 수 없음을 노래하고 말았다.)

// 다윗은 시간 공간 상황을 초월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주님을 노래한다.  나는 다윗이 노래한 전지전능과 무소부재를 임마누엘의 신비라고 이해한다. 내가 찾아서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깨닫게 하심이) 필요한 신비라고 노래한다. 그럼에도 무지한 우리는 내가 찾아서 알려고 한다. 그래서 새벽부터 주님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결국 깨닫는다. 내가 주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나를 온전히 아시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나는 오늘도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편다. 말씀은 내가 주님을 알아가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주님이 나를 알고 계심을 확인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아신 바 됨에 감사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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