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0 (1-13)

1-5 다윗은 주님께 악인에게서 건져달라고, 포악한 자에게서 지켜 달라고 간구한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자들로부터 지켜달라고 간구한다. 악인들이 연합해서 자신을 공격함이 뱀처럼 지혜롭고 치밀하며 독사의 독처럼 치명적이라고 한다. 주님만이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실 수 있으시다고 노래한다. 악인들이 주님의 길을 따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걷고있는 다윗을 밀치고 당기려고 하니 보호해 달라고 노래한다. 교만한 자들이 다윗이 걷는 주님의 길에 올무와 덧을 두고 그물을 펼치고 함정을 팠다고 고발한다.

6-8 (험한 인생길에서) 다윗은 주님만이 자신을 지켜주실 수 있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간구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한다. 다윗은 주님을 구원의 능력이라고 고백한다. 다윗이 치른 수많은 전쟁에서 자신의 투구가 되어주신 주님을 노래한다. 악한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으려는 무리들의 소원을 허락하지 말라고 탄원한다. 스스로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교만한 저들이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9-11 대적들이 머리를 들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말들이 악인들에게 자업자득이 되게 해 달라고 노래한다. 자신들이 한말로 스스로 수치를 당해 쥐구멍에 들어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노래한다. 모함하는 자들, 화평을 깨는 자들은 세상에서 고개들고 살지 못하게 하시고 사회적 약자들을 착취하는 자들은 패망시켜 달라고 간구한다.

12-13 다윗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기도한다.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시고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한다. 다윗은 의인은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주의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자들이라고 노래를 맺는다.

// 잠언 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사람, 곧 ‘의인’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사람이다.  임마누엘이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이라 온전한 의를 행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이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행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의인’의 정의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예수 안에 거하고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는 삶도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이어야 한다. 잠언에서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준다는 표현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난한 자들을 대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줄 지식이 없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한다. 하나님보다 높아졌다는 곧 교만하다는 뜻이다.

누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지는 자명하다.

시편 139:13-24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13-16 다윗은 임마누엘의 신비를 주님이 자신을 손수 지으셨음에서 찾는다. 주님이 오장육부를 모태에서 만드셨다. 다윗은 유전자를 주님으로부터 기묘하게 받았음을 감사하며, 육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났음을 고백한다. 은밀한 곳 땅의 깊은 곳은 사람이 손댈 수 없는 모태를 뜻할 것이다. 이런 모태에서 아직 태아의 형태를 띠기 전, 성별이 결정되기 전부터 주님은 다윗을 아셨고, 다윗의 삶을 프로그램하셨다고 노래한다. // 다윗은 자신의 로봇됨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찬양한다.

17-18 하나님께로부터 난 다윗은 자신에 대한 주님의 생각(프로그램)에 감탄한다. 보배롭다고 하며 한 수 앞도 못보는 인생에 비하여 주님은 백수 앞도 보시는 분이시라고 노래한다. 주님은 인생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다윗 자신은 전혀 헤아릴 수 없는 인생의 행보, 그러나 다윗은 임마누엘을 노래한다. 셀 수 없는 희노애락의 순간들, 곧 매 순간 순간이 임마누엘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19-22 임마누엘에 만족한 다윗은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악인들에게 떠나라고 말한다. 주님에 대해 악한 말을 하고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자들에게서 떠난다. 주님이 미워하시는 자들을 다윗도 미워하고 주님의 원수들을 다윗도 원수삼는다. 임마누엘이 악인을 미워하는 주님의 영적 유전자를 다윗에게 그대로 물려준 결과다.

23,24 다윗은 주님께 자신에게 버그나 바이러스가 없는지 늘 스캔해달라고 노래한다. 바이러스가 침투해 주님이 프로그램하신 대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곧 임마누엘이 깨어지는 오류가 일어나지 않도록 간구한다. 다윗은 영원한 임마누엘, 영생을 꿈꾸며 노래한다.

// 주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백신임을 고백하게 하는 토욜아침.

시편 139:1-12

하나님의 아신 바 된 은혜

1- 6 주님은 나를 아신다. 공장에서 나를 찍어내셨기 때문에 나의 스팩(사양)을 아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셔서 유니크한 나를 아신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주님은 나의 일거수일투족만 아시는 것이 아니시라 나의 생각도 밝히 아신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깨어있을 때도 잘 때도 나의 모든 행동과 습관을 아신다. 심지어 내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두 다 아신다. 이런 주님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 나와 어깨동무하고 (나를 부축하고) 걸어주신다. 임마누엘! 이 임마누엘의 지식은 오히려 신비라고 해야 맞다. 내가 능히 깨닫지 못하는 신비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필요하다.)

7-12 임마누엘!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문제는 내가 잘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영을  떠나 유리한다. 주님을 찾는 다는 것이 마치 주님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이라도, 아골골짜기라도 내가 있는 곳에 주님은 함께 계시는데. 나는 새벽부터 주님을 찾아 바다 끝까지 날라가본다. 주님은 거기까지 따라오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는데. 나는 때때로 빛되신 주님의 임재를 깨닫지 못하고 흑암에 둘러쌓여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나도 시인을 따라 노래한다. 내가 흑암 속에 있어도 주님은 나를 보고 계신다고. 주님의 나에 대한 사랑은 밤과 낮이 같고 흑암 속에서나 밝은 빛 가운데서도 같다고. (다윗은 주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노래하지만 난 주님을 찾을 수 없음을 노래하고 말았다.)

// 다윗은 시간 공간 상황을 초월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주님을 노래한다.  나는 다윗이 노래한 전지전능과 무소부재를 임마누엘의 신비라고 이해한다. 내가 찾아서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깨닫게 하심이) 필요한 신비라고 노래한다. 그럼에도 무지한 우리는 내가 찾아서 알려고 한다. 그래서 새벽부터 주님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결국 깨닫는다. 내가 주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나를 온전히 아시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나는 오늘도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편다. 말씀은 내가 주님을 알아가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주님이 나를 알고 계심을 확인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아신 바 됨에 감사하는 아침이다.

시편 138 (1-8)

시인 다윗은 주어를 ‘나’, ‘그들’, ‘주님’으로 확장하며 노래한다.

1-3다윗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중의 신이신, 하나님만을 찬양한다. 다윗은 성전을 향해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의 이름에 감사한다.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역사가(사역이) 일침됨에 감사찬양 한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들보다도 (여호와 이레, 닛시, 라파, 삼마, 샬롬…) 주님의 말씀에 (언약에) 굴복한다. 무엇보다도 그날 그날 응답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다윗의 영혼을 강건케 했다고 노래한다.

4-5 다윗은 주어를 ‘그들’로 바꿔 노래한다. 그들은 세상 모든 왕들이다. 다윗은 자신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왕들 중 한명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다. 세상 모든 왕들 역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세상 모든 왕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불러야 한다고 노래한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주님의 길을 걷는 것이요, 크신 영광의 주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라고 노래 한다. 주님의 길이 왕들이 가야할 길이다.

6-8a 다윗은 주어를 ‘주님’, 곧 하나님으로 바꿔 노래한다. 주님이야 말로 신중의 신이시고 왕중의 왕이시다. 홀로 하늘의 하나님이시다. 이 주님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를 심판하신다. 주님은 하늘에서도 누가 교만한 지 아신다. 누가 착취자인지 아신다. 주님은 환난 중에 있는 다윗을 구하셨듯이 착취하는 자들로부터 사회적 약자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실뿐만 아니라 보상해주시는 분이시다. 주님의 사랑이 크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8b다윗은 마지막으로 자신도 주님의 손으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겸손히 노래한다. 주님이 지으신 자신을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간구하면서 노래를 맺는다.

// 왕으로 주 앞에 서서 감사찬양을 드리는 다윗이, 자신도 주님의 손으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고백한 것 처럼 저도 주님이 지으신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모두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주님의 이름들보다, 주께서 말씀하신 언약에 먼저 순종하기를 다짐합니다. 더딘 기도 응답에도 제가 피골상접하지 않도록, 그날 그날 주님의 말씀을 읽게 하셔서 제 영혼을 강건케 해주십시오. 설령 제가 포기하더라도 주님은 저를 포기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를 주님의 구원사역에 포함시켜 주십시오.

시편 137 (1-9)

세상에 발을 담그고

시인은 비참한 가운데 우리를 기억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지 않았던가? 오늘 시인은 비참한 가운데 주님을 기억하며 울며 읊조린다.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 강가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은 강가에 모여있는 포로들에게 한곡 뽑으라고 놀린다. 시온의 노래중 하나를 불러보라고 한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찬송가를 불러보라고 비꼬는 것이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하는 것이다. (시78:10)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의 백성들은 차마 찬송을 부를 수 없었다. 수금을 버드나무에 그냥 걸어둘 수 밖에 없었다. 시온을 생각하며 울 수밖에 없었다.

(울면서) 낯선 바벨론 땅에서 어떻게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시인의 노래는 오직 예루살렘뿐인데. 시온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뿐인데. 예루살렘아 난 너를 잊을 수 없다. 내가 너를 (주님을) 잊는다면 무슨 풍악을 울리랴. 시온에서 형제와 연합하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면 무슨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기타를 벽장 속에 넣어두고 벙어리로 살아가는 게 낫다는 마음뿐이다.)

시인은 주님앞에 고개를 떨군다. 예루살렘 함락을 보고 망해라 망해라 망해라 하면서 기뻐하던 형제 에돔을 벌해 달라고 노래한다.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을 죽음에 몰아 넣은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노래하면서, 바벨론은 씨가 끊어지도록 멸망시키라고 저주한다. // 마치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동족)들을 착취한 자신들의 잘못을, 형제 에돔의 악행과 심판의 칼 바벨론의 포악에 빗대어 뉘우치는 것일까? 자신들이 에돔과 바벨론과 다를게 없었음을 시인하는 것일까? 시인이 하나님은 우리 행위대로 갚으시는 분이심을 잘 알았기에 이렇게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 “Rivers of Babylon”. 자메이카 레게그룹인 멜로디안이 불렀던 이 노래는 보니엠에 의해 7080년대 히트송이 되었다. 이 노래는 착취와 업압과 박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노래로 불려졌다. 솔직히  가사와  상관없이 디스코의 열풍을 타지 않았을까? 그때는 시편의 노래인줄 몰랐는데. 이노래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바라네”라는 시편 19편,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주의 말씀으로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달은 시인의 결론도 담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세상에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님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는데,  정작 우리가 있는 곳은 (사랑의 나눔이 있는) 시온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만 있는) 바벨론 강가가 아닌가.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는 어리석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부를 노래는 무엇일까? 찬양과 경배의 노래보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부르심과 회복을 간구하는 노래를 우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울며 읊조리며 이웃사랑으로 하나님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주님은 바벨론 어느 강가에 있을지 모를 우리(나)에게 다시 시온을(사 11:6-8) 꿈꾸라고 하신다. 바벨론 강가를 시온으로 만들라고 하신다.  행위대로 갚으시는 주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바라네”

7-9절은 바벨론 강가의 이스라엘 포로들이 바벨론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자기네 말로 불러준 노래의 가사가 아닐까? 마치 보니엠이 멜로디안의 애절한 노래를 디스코풍으로 불러냈듯이.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불러야 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도 이웃사랑으로 숨겨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