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22-34

그랄 왕 아비멜렉과 그랄의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왔다. 이들은 우선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심을 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냈기 때문일까?. 그런데 갑자기 왜? 아비멜렉과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평화협정을 맺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이 의롭다고,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일을 처리했다고 인정하신 적이 있다. 그때 오히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왜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하였느냐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느냐고) 책망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기도로 아비멜렉 가문의 태가 열렸었다. 이렇게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사라를 범하지 않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기도로 왕위를 이을 수 있게된 것이 아비멜렉이 경험한 하나님이다. 아비멜렉은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일까? 아비멜렉은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아브라함을 본 것은 아닐까?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 않았던가? 최근에 들려오는 소식은 아들 이스마엘을  하갈과 함께 광야로 쫓아내지 않았던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살아온 아비멜렉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자신이 선대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평화롭게 자신의 땅에 거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 평화가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믿어도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은 존재라느 생각이 들었나보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과 손자에게 거짓되게 행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온 것이다. 그것도 군대장관과 함께.

아브라함은 이때 오히려 평화를 깨는 것은 아비멜렉의 종들이라고 말한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았지만 아브라함은 그래도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다고 하면서 자신도 언약을 맺어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은 언약을 맺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약을 맺은 곳이 브엘세바다. 아브라함과 아들 이스마엘의 평화가 깨진 곳이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 주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아비멜렉과의 평화에 대한 감사 찬양이었을까? 이스마엘(과 하갈)을 기억하며 용서도 구했을까?

블레셋 사람의 땅이라는 표현이 두번 나온다. 언약후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이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날 (오랜 기간) 거주했다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한다. 평화언약을 맺은 땅이 블레셋 사람의 땅이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아모리 족속 마므레 형제들과 동맹(언약)을 맺고 마므레의 수풀에 거주했었다. 이번에는 아비멜렉과 동맹(언약)을 맺고 블레셋 사람이 땅에 거주했다. 창세기에 나오는 언약은 이 두 동맹(언약)을 제외하면 모두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맺은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맺을 언약은 화평밖에 없다. 오늘날 팔레스타인(블레셋) 땅에 사는 사람들이 수천년전 그들의 조상들이 맺은 평화를 불러내왔으면 좋겠다.

세상에 거주하는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댓가를 치르면서 화평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창세기 21:1-21

주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주하나님이 말씀하신 때가 되어 사라는 노년의 (백세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말씀대로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다. 이삭에게도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다. 마침내 사라는 웃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웃게하셨다. 이삭은 자라 젖을 뗐고 젖을 떼는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어 기뻐했다.

사라가 보니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창세기 저자는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라고 적는다.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그냥 볼 수 없었다. 아브라함에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이 일로 근심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말고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기 때문에 이스마엘로도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다. 브엘세바 광야로 쫓겨난 하갈은 목마르고 지친 이스마엘을 멀리두고 소리내어 울 수 밖에 없었다. 이스마엘도 울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갈에게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하갈로 기운차리게 하시고 샘에서 물을 길러 이스마엘에게 마시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함께해 주셨다. 이스마엘은 사냥꾼이 되었고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 하갈은 이스마엘을 위해 애굽여자를 아내로 얻어 주었다.

// 임마누엘의 신비는 ‘함께 계심’에 머물지 않는다. ‘함께 동행’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가 두번 반복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이삭을 낳는다. 곧 주하나님께서 사라와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다. 그렇다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했느냐는 별개문제다. 앞선 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이 온전한 화평을 이루지 못한 것이 그 증거라고 지적했다.

20절에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라고 기록한다. 그렇다고 이스마엘이 하나님과 동행했을리 만무다. 이스마엘이 독립할 수 있는 사냥꾼이 되었고 돕는 베필을 애굽여인 중에서 찾았다는 것이 하나님 없이  살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해도 비도 공평하게 주신다.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동행할 수 없는 멀리 계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진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만 동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에 이삭을 낳은 사라의 웃음(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스마엘이 눈엣가시로 보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언약에서 언급한 복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와 공도를 행하는 ‘하나님나라의 기사작위’를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의와 희락과 화평을 이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나님은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의 화평을 위해 불순종의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신것은 아닐까? 그래서 마음이 아픈 대목이다. 바울의 갈라디아서 해석이 조금도 위로가 안되는 아침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온전한 순종으로 완성된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온전한 동행을 위해서 이 문제로 근심하는 아브라함을 본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으리라. …

창세기 20

아브라함은 오래 머물던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수풀지역에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기 시작했다. 아모리 족속 마므레 형제들과의 동맹이 깨어진 것일까? 하여간 새로운 동네로 이사 온 아브라함은 애굽에서와 같이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한다. 60세도 아니고 90이 다 된 사라를 누이라고 또 속이다니…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가나안에 도착해서 남방으로 이동할 때 일어난 일이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어 여기에 끼어넣은 것일까?)

그 지역의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 사라를 데려갔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셔서 남편이 있는 여자를 취했기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아비멜렉은 아직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라고  항변한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했고 사라도 아브라함을 오빠라고 했기 때문에 사라를 취했으니 자신은 의롭다고 고발한다. 하나님은 (꿈에) 아비멜렉에게, 아비멜렉이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알기 때문에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하셨다고 응답하시며,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소개하신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면 아비멜렉이 살것이고, 사라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에게 속한 자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아비멜렉은 종들에게 꿈을 들려주고 아브라함을 불러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했다고 꾸짖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라로 말미암아 자신을 죽일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답하면서도, 사라가 이복누이로서 아내가 되었다고 가는 곳마다 이렇게 했다고 답을 한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돌려주고 양과 소와 종들도 아브라함에게 주었다. 아브라함에 그랄 땅에 거할 수 있도록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아비벨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다. 18절은 애매하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해 아비멜렉 집안의 태가 닫힌 것이 아니라, 주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가 닫힌 것이 열리는 것을 보게하심으로 출산은 주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교훈하시는 사건인 것 같다.

// 그랄 왕 아비멜렉은 자신을 의로운 백성이라고 한다. 자신이 행한 일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한 것이라고 하자, 하나님도 아비멜렉이 온전한 마음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합리적이고 공정하다는 의미다. ‘의’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했다. 성경앱에 따르면 “노아는 의인”이라고 했을 때도, 아브라함이 의인 오십, 사십 오, 사십, 삼십, 이십, 십 명 의인을 언급했을 때도 이 단어를 쓴다. 결론적으로 ‘의’는 하나님께서 합리적이고 공정하신 분이라는 것을 교훈한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소개한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삶을 돌아본다면 선지자란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 기도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자가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더 공정하고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선지자요,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이유는 공정하고 합리적을 뛰어 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름다와서가 아니라 왕가의 태가 닫혔기 때문에 열국의 어미라는 이름을 가진 ‘사라’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꿈에 나타난 하나님 앞에서도 의로왔다. (하나님께 순종한다.) 사건의 결말을 보면 아비멜렉이 사라를 돌려보내야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비멜렉이 후사를 얻는다는 것이고 죽는 다는 것은 후사가 완전히 끊긴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결국 모태를 열고 닫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교훈한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아비멜렉은 후손을 얻게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그랄 왕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종들의 닫혔던 태를 여신 것을 보면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키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웃음이 아니라 기도하게 되었을 것이다.

 

창세기 19:24-38

롯이 소알로 피하자마자 주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셔서 소돔과 고무라 주변의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을 다 엎어 멸하셨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되었다고 한다. (롯이 소알성으로 피신할 때 롯의 아내는 롯보다 더 지체했다는 뜻이리라. ㅠㅠ)

아브라함은 그날 아침 주하나님을 배웅하러 나갔던 곳으로 갔고 그곳에서 소돔과 고모라 쪽에서 연기가 치솟음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었구나라는 생각보다 롯은 어찌 되었을까? 라고 조카를 더 염려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살려주셨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는 것은 롯이 아브라함의 핏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셨다기보다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라는 아브라함의 간구를 기억하셨다는 뜻이 강할 것이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 두 딸과 함께 살아남았다. 소알로 피난한 롯은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은 롯으로 하여금 성읍생활을 포기하게 한다. 두 천사가 롯에게 처음 명한대로 산으로 피신해서 두 딸과 함께 굴에서 거주했다. 왜 롯은 두 딸과 함께 삼촌 아브라함에게 가지 않았을까?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에 소알 성으로 피난 가겠다는 롯은 여전히 성읍생활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그러나 소알 성에서도 죄악을, 성적문란함을 보지 않았을까? 그래서 결국은 산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문제는 과년한 두 딸에게 있었다. 두 딸은 배필될 사람을 구하지 못하자 아버지 롯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술취한 아버지와 동침해서 후손을 이어가기로 계획하고 실행한다. 성문란을 피해 소알 성을 떠났건만 돌아온 것은 더 큰 성문란이었다. 롯의 두 딸이 술취한 아버지와 동침해서 나은 아들이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된다.

// 의인의 장막에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장막이 될 것이다) 롯과 두 딸은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롯이 결국 소알을 떠나기로 했다면 응당 삼촌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다. 분가를 했지만 소돔이 엘람 왕에게 패하여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도 아브라함이 사병을 이끌고 가서  구해주지 않았던가? (한편 아브라함은 왜 조카를 찾지 않았을까? 찾았는데도 롯이 피했을까?) 그런데 롯은 산으로 도망해 외톨이가 되고 만다. 죄악으로부터 벗어남은 의인의 회중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의인 (의로와지려는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려는 사람)과의 교제가 없다면 죄로부터의 일시적인 도피는 더 큰 죄악,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사건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소돔에서 나름 의롭게 살려고 했던 롯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성읍생활에 미련을 두었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후에는 아예 세상과 등지고 말았다. 세상에 미련을 두거나 세상을 등지거나 모두 하나님이 바라시는 성도의 삶이 아니다. 롯과 두 딸의 결과가 말해준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야 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뤄 서로 지체가 되어야 한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야 한다. 교회의 역할이다.

창세기 19:12-23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두 천사는 서두른다. 롯에게 롯의 가족들을 모두 다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가라고 명한다. 소돔에 대한 부르짖음이 (아마도 성문란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부르짖음이) 주하나님 앞에 커서 주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시려고 두 천사를 보냈기 때문에, 두 천사는 주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소돔을 멸하겠다고 말한다.

롯은 딸들과 사위 될 사람들에게 소돔 성을 떠나야 된다고 말을 하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 롯이 가족들을 설득하는 동안 벌써 동틀 때가 되었고 두 천사는 롯을 재촉하여 아내와 두 딸들만이라도 데리고 성을 떠나라고 명한다. 롯에게 소돔성의 죄악중에서 함게 멸망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럼에도 롯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지체하자 두 천사는 롯과 롯의 아내 그리고 롯의 두 딸을 손을 잡아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창세기 기자는 주하나님께서 롯에게 자비를 더하셨다고 기록한다. 두 천사는 롯과 아내와 두 딸에게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라고 명한다. 롯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라고 간청한다. 성읍 생활에 익숙해진 롯은 산 대신  옆에 있는 작은 성읍 소알로 피신하게 해 달라고 청했고 주하나님은 롯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주하나님은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까지 소돔의 멸망을 미루셨다.

// 롯은 소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지체했다. 두 천사의 손에 이끌려서야 소돔을 벗어났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상황을 주하나님께서 롯에게 자비를 더하셨다고 평가한다. 소돔의 생활에 젖은 롯이었지만 그래도 롯은 성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두 천사를 탐한 소돔 사람들에게 롯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두 딸이 있다고 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딸에게는 결혼할 사위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롯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지만) 성적으로 문란한 소돔성에 살았지만 두 딸에게 혼전순결을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두 딸이 롯을 속였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듯 롯이 주하나님의 자비를 얻은 것은 아브라함의 조카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비를 더 받았다고 안심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온전한 응답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 자꾸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미련을 두고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지체한다면, 결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