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7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주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이스마엘을 낳고도 십년이상의 세월이 훌쩍지났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전능한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고 명령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완전한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지난 십여년 동안 아브람이 하나님보시기에 완전하지 못했다는 뉘앙스다. 주하나님은 다시한번 아브람을 크게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언약을 상기시켜 주신다. 아브람은 엎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언약을 이름에 담아 개명하신다. 언약의 핵심은 역시  갑이신 주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을인 아브라함과 아브라함 후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신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 가솔들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후손들은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시키라고 명하신다. 할례에 대한 순종이 곧 언약에 대한 순종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복에 복을 주시며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개명하신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여러민족의 어머니라는 언약을 이름에 담아 주셨다. 아흔아홉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임재에 엎드려서 이 모든 약속을 받았다. 엎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아브라함은 속으로 웃었다. 백세에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에 어찌 출산 할까? 라고 속마음을 적은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은 태를 열고 닫으시는 하나님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스마엘이 상속자가 아닙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으라고 하신다.  이삭과 언약을 세우고 이삭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인정하셨다.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시고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스마엘도 열두 두령을 낳아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언약을 아브라함이 아닌 내년에 사라에게서 아브라함이 낳을 이삭과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말씀을 마치시고 아브라함을 떠나 올라가셨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온 가솔 중 남자에게 할례를 행했다. 아브라함이 아흔 아홉이었고 이스마엘은 십삼 세였다.

//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언약을 담은 이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셨지만, 또 사래도 사라로 개명해주셨지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아브라함의 생각은 주제넘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바로 영원한 언약의 대상을 이삭으로 싹 바꾸신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언약의 통로지만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쏙빼고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이삭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삭의 후손들을 통해 언약을 이어가시겠다고 아브라함에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언약의 대상자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바뀌었다.

어제 이스마엘에 대한 묵상에 이어 오늘도 느끼는 점은 비록 사라가 낳지는 않았지만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이스마엘 출생 후 십여년이 지났지만 아브람, 사래, 하갈과 이스마엘의 불화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상징인 이스마엘을 언약의 대상자로 삼지 않으셨다. 만약 이스마엘이 출생한 후, 아브람과 사래,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의 관계가 온전히 치유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화목/화평의 상징인 이스마엘을 통해서 언약을 이어가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말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 주제 넘은 생각들과 적용은 (지금 나의 생각도 어쩌면… ㅠ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가로 막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가, 아브라함을 떠나시기도 하신다. 할례와 같은 단기적이고 육체적인 명령은 고통이 따라도 차라리 순종하기 쉽다. 그러나 인내로 소망을 이루어 가는 믿음의 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쉽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던 것이 십여년 전이었는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도 불신을 본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아브라함을 미화할 필요가 없다.

언약(말씀)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 임마누엘! 성도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항상 나갈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가장 큰 은혜다. 말씀을 깨닫기 위해 언제나 겸손히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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