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

아브라함은 오래 머물던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수풀지역에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기 시작했다. 아모리 족속 마므레 형제들과의 동맹이 깨어진 것일까? 하여간 새로운 동네로 이사 온 아브라함은 애굽에서와 같이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한다. 60세도 아니고 90이 다 된 사라를 누이라고 또 속이다니…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가나안에 도착해서 남방으로 이동할 때 일어난 일이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어 여기에 끼어넣은 것일까?)

그 지역의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 사라를 데려갔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셔서 남편이 있는 여자를 취했기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아비멜렉은 아직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라고  항변한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했고 사라도 아브라함을 오빠라고 했기 때문에 사라를 취했으니 자신은 의롭다고 고발한다. 하나님은 (꿈에) 아비멜렉에게, 아비멜렉이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알기 때문에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하셨다고 응답하시며,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소개하신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면 아비멜렉이 살것이고, 사라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에게 속한 자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아비멜렉은 종들에게 꿈을 들려주고 아브라함을 불러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했다고 꾸짖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라로 말미암아 자신을 죽일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답하면서도, 사라가 이복누이로서 아내가 되었다고 가는 곳마다 이렇게 했다고 답을 한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돌려주고 양과 소와 종들도 아브라함에게 주었다. 아브라함에 그랄 땅에 거할 수 있도록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아비벨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다. 18절은 애매하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해 아비멜렉 집안의 태가 닫힌 것이 아니라, 주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가 닫힌 것이 열리는 것을 보게하심으로 출산은 주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교훈하시는 사건인 것 같다.

// 그랄 왕 아비멜렉은 자신을 의로운 백성이라고 한다. 자신이 행한 일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한 것이라고 하자, 하나님도 아비멜렉이 온전한 마음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합리적이고 공정하다는 의미다. ‘의’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했다. 성경앱에 따르면 “노아는 의인”이라고 했을 때도, 아브라함이 의인 오십, 사십 오, 사십, 삼십, 이십, 십 명 의인을 언급했을 때도 이 단어를 쓴다. 결론적으로 ‘의’는 하나님께서 합리적이고 공정하신 분이라는 것을 교훈한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소개한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삶을 돌아본다면 선지자란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 기도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자가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더 공정하고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선지자요,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이유는 공정하고 합리적을 뛰어 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름다와서가 아니라 왕가의 태가 닫혔기 때문에 열국의 어미라는 이름을 가진 ‘사라’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꿈에 나타난 하나님 앞에서도 의로왔다. (하나님께 순종한다.) 사건의 결말을 보면 아비멜렉이 사라를 돌려보내야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비멜렉이 후사를 얻는다는 것이고 죽는 다는 것은 후사가 완전히 끊긴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결국 모태를 열고 닫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교훈한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아비멜렉은 후손을 얻게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그랄 왕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종들의 닫혔던 태를 여신 것을 보면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키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웃음이 아니라 기도하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