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주하나님이 말씀하신 때가 되어 사라는 노년의 (백세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말씀대로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다. 이삭에게도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다. 마침내 사라는 웃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웃게하셨다. 이삭은 자라 젖을 뗐고 젖을 떼는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어 기뻐했다.
사라가 보니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창세기 저자는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라고 적는다.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그냥 볼 수 없었다. 아브라함에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이 일로 근심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말고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기 때문에 이스마엘로도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다. 브엘세바 광야로 쫓겨난 하갈은 목마르고 지친 이스마엘을 멀리두고 소리내어 울 수 밖에 없었다. 이스마엘도 울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갈에게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하갈로 기운차리게 하시고 샘에서 물을 길러 이스마엘에게 마시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함께해 주셨다. 이스마엘은 사냥꾼이 되었고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 하갈은 이스마엘을 위해 애굽여자를 아내로 얻어 주었다.
// 임마누엘의 신비는 ‘함께 계심’에 머물지 않는다. ‘함께 동행’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가 두번 반복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이삭을 낳는다. 곧 주하나님께서 사라와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다. 그렇다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했느냐는 별개문제다. 앞선 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이 온전한 화평을 이루지 못한 것이 그 증거라고 지적했다.
20절에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라고 기록한다. 그렇다고 이스마엘이 하나님과 동행했을리 만무다. 이스마엘이 독립할 수 있는 사냥꾼이 되었고 돕는 베필을 애굽여인 중에서 찾았다는 것이 하나님 없이 살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해도 비도 공평하게 주신다.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동행할 수 없는 멀리 계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진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만 동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에 이삭을 낳은 사라의 웃음(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스마엘이 눈엣가시로 보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언약에서 언급한 복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와 공도를 행하는 ‘하나님나라의 기사작위’를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의와 희락과 화평을 이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나님은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의 화평을 위해 불순종의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신것은 아닐까? 그래서 마음이 아픈 대목이다. 바울의 갈라디아서 해석이 조금도 위로가 안되는 아침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온전한 순종으로 완성된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온전한 동행을 위해서 이 문제로 근심하는 아브라함을 본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