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9:1-11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을 향한 두 천사는 저녁에 소돔에 도착한다. 아브라함을 방문한 하나님의 현현은 세분이셨는데, 19장에서는 그 두천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에게는 한분 하나님이 두천사를 데리고 방문하셨고, 롯에게는 두 천사만 먼저 보내셨다. (아브라함이 주하나님을 막아서서 중보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세명을 보자 달려나가 영접했는데, 롯은 성문에 앉아 있다가 두 천사를 보고 일어나 영접한다. 롯도 두 천사를 영접하여 발을 씻기우고 잠자리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한다. 아브라함의 초대에 세사람(주하나님과 두 천사)은 네말대로 그리하라고 흔쾌히 초대를 받아들였는데, 롯에게는 롯이 간청해서야 롯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브라함은 반죽한 떡과 기름진 송아지와 치즈(엉긴 젖)와 우유를 대접했는데 롯은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워 대접했다고 한다. 물론 무교병을 대접한 것은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였겠지만 삐딱하게 보면 창세기 저자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하나님과 롯의 관계보다 돋보이게 기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천사의 도착은 성내에 소문이 났다. 사람으로 현현한 두 천사는 사람과 어떻게 달랐을까? 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을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소돔 성내 사람들이 롯의 집앞으로 모여들었다. 소돔 사람들은 롯을 방문한 손님들이 누구인지 알아봐야겠다고 롯을 불러냈다. 롯은 무리 앞에 나가서 소돔 사람들에게 형제라 부르면서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롯이 여기까진 정상적인데… 돌연 손님대신 두딸을 내어줄테니 손님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고 제안한다. 소돔사람들이 원한 것은 두 천사와의 성관계였던 것이다. 소돔 사람들은 롯의 제안을 거부하고 롯을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부수려고 했다. 안에 있던 두 천사는 손을 내밀어 롯을 집안으로 끌어 들이고 문을 닫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문밖의 무리의 눈을 멀게하여 롯의 집이 어딘지 모르게 만들었다. 두천사는 성적탐욕에 눈이 먼 소돔사람들의 육신의 눈도 멀게한 것이다.

 // 소돔의 가장 큰 죄악은 성적문란이다. 하나님은 성애(섹스)를 부부관계에서만 허락하셨다. 이것이 무너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은 무엇일까? 분명 성애관계의 피해자들일 것이다. 가정 파괴, 성매매, 사생아 등등… 두딸을 내어주겠다는 것을 보아 롯도 소돔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소돔이 어떤 곳인지 잘 알면서도 아브라함처럼 마므레 수풀의 장막에 거하기 보다 소돔에 머물렀다는 것은, 롯의 가족이 주상복합과 같은 성읍생활의 편리함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길을 떠나, 의와 공도를 행하지 않는 소돔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성적문란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성도들을, 성도들의 가정을 지켜주소서.

창세기 18:16-33

아브라함은 소돔으로 떠나시는 세 손님을 전송하러 나갔다. 아브라함은 길떠나는 삼위 하나님의 대화를 듣는다. 분명 세사람의 대화지 주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하는 말이 아니다. 주하나님께서는 헤어지는 마당에서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으시고 일부러 들을 수 있게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서로 이야기 하시면서 길을 떠나신다.  주하나님의 복이 무엇이며 주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이루실 일은 무엇인가? 바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주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주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라고 하신다. 주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으로 가는 이유도 들려주신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무거움을 보러 가신다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방금 주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이 택함을 받은 이유를 주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함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는 의와 공도를 행하지 않는 곳의 대명사다. 죄악이 심히 무거운 곳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을 누가했을까?) 이에 아브라함은 소돔을 향하시는 주하나님 앞에 섰다. (함께했던 두 천사는 먼저 소돔으로 출발) 그리고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이 부당하다고 주하나님께 아뢴다. 의인과 악인이 공동운명체라는 것은 부당하다며, 주하나님께 정의롭게 심판해 달라고 아뢴다. 주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청대로 의인 오십 명, 아니 사십오 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답하신다.

아브라함의 여전히 주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몰랐다. 의로운 자 한명만으로도 긍휼을 베푸실 수 있으신 하나님을 몰랐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브라함은 주하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주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주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말씀을 마치시고 떠나셨고 아브라함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갔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부러 들으라고 서로 이야기 한 내용은 아브라함이 받을 복과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이란 무엇인가? 바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주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주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 성도는 하나님의 가르침(도)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의)을 닮아,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멸함을 받지 않는 의인의 회중에 드는 삶(공도)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정의다. 성도들이 택함을 받은 이유다.

삼위하나님은 이 정의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 소돔으로 향하신다. 아브라함의 중보는 일차적으로 롯을 위한 것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의로운 자 한명 만으로도 긍휼을 베푸실 수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 한명 만으로도 긍휼을 베푸신다. 성도들이 긍휼함을 입은 것이 그 증거다. 단 한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이땅에서도 소돔 시민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라고 하신다. 의로운 자 한 명을 닮아가라고 하신다.

창세기 18:1-15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에 여전히 거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을 떠나셨던 주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다.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앉아 서 한 낮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세사람이 맞은 편에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마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냥) 달려나가 영접하며 그들에게 엎드려 인사했다. 그리고 그들을 주라고 부르며 발을 씻겨드리고 떡으로 대접하겠다고 했다. 세사람은 아브라함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세사람은 느닷없이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브라함이 사라는 장막에 있다고 대답하자 세사람은 내년 이맘때 다시 왔을 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었다. 마침 장막 안에서 이 소식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었다.

주하나님은 (세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좋은 소식을 웃으면서 불신하느냐라고 책망하신다. 주하나님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기한이 이를 때에 다시 방문할 것이고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확언해 주신다. 장막에서 나온 사라는 자신의 속막음이 읽히자 두려움에 내가 웃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지만 주하나님은 사라가 웃었다고 하신다.

// 손대접하는 일은 잘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는 것이 부족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부부. 아브라함부부는 자신들의 머리로 이해되는 부분에서 순종하는 것은 잘하지만, (예를 들면 할례를 행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아직까지도 믿지 못한다. 믿음의 조상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17장에서 아브라함이 웃었듯이  18장에서는 사라가 웃는다. 부창부수다. 주하나님께서 손님으로 찾아주시고 말씀으로 친히 약속을 상기시켜 주시지만 아브라함/사라 부부는 여전히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라는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웃었다고 하시는데 내가 웃지 아니하였다고 답하는 사라의 무지함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전 믿음을 기억하시고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 부부에게 긍휼을 내리신다. 적어도 저들의 불신은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순종적인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뤄가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 19:21)

창세기 17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주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이스마엘을 낳고도 십년이상의 세월이 훌쩍지났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전능한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고 명령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완전한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지난 십여년 동안 아브람이 하나님보시기에 완전하지 못했다는 뉘앙스다. 주하나님은 다시한번 아브람을 크게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언약을 상기시켜 주신다. 아브람은 엎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언약을 이름에 담아 개명하신다. 언약의 핵심은 역시  갑이신 주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을인 아브라함과 아브라함 후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신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 가솔들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후손들은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시키라고 명하신다. 할례에 대한 순종이 곧 언약에 대한 순종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복에 복을 주시며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개명하신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여러민족의 어머니라는 언약을 이름에 담아 주셨다. 아흔아홉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임재에 엎드려서 이 모든 약속을 받았다. 엎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아브라함은 속으로 웃었다. 백세에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에 어찌 출산 할까? 라고 속마음을 적은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은 태를 열고 닫으시는 하나님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스마엘이 상속자가 아닙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으라고 하신다.  이삭과 언약을 세우고 이삭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인정하셨다.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시고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스마엘도 열두 두령을 낳아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언약을 아브라함이 아닌 내년에 사라에게서 아브라함이 낳을 이삭과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말씀을 마치시고 아브라함을 떠나 올라가셨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온 가솔 중 남자에게 할례를 행했다. 아브라함이 아흔 아홉이었고 이스마엘은 십삼 세였다.

//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언약을 담은 이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셨지만, 또 사래도 사라로 개명해주셨지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아브라함의 생각은 주제넘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바로 영원한 언약의 대상을 이삭으로 싹 바꾸신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언약의 통로지만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쏙빼고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이삭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삭의 후손들을 통해 언약을 이어가시겠다고 아브라함에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언약의 대상자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바뀌었다.

어제 이스마엘에 대한 묵상에 이어 오늘도 느끼는 점은 비록 사라가 낳지는 않았지만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이스마엘 출생 후 십여년이 지났지만 아브람, 사래, 하갈과 이스마엘의 불화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상징인 이스마엘을 언약의 대상자로 삼지 않으셨다. 만약 이스마엘이 출생한 후, 아브람과 사래,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의 관계가 온전히 치유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화목/화평의 상징인 이스마엘을 통해서 언약을 이어가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말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 주제 넘은 생각들과 적용은 (지금 나의 생각도 어쩌면… ㅠ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가로 막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가, 아브라함을 떠나시기도 하신다. 할례와 같은 단기적이고 육체적인 명령은 고통이 따라도 차라리 순종하기 쉽다. 그러나 인내로 소망을 이루어 가는 믿음의 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쉽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던 것이 십여년 전이었는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도 불신을 본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아브라함을 미화할 필요가 없다.

언약(말씀)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 임마누엘! 성도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항상 나갈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가장 큰 은혜다. 말씀을 깨닫기 위해 언제나 겸손히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

창세기 16

15장에서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아브람의 상속자가 되리라 라고 하셨고 아브람은 주하나님을 믿었다. 주하나님은 이 믿음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예순이 넘도록 출산하지 못한 여자였다. 아브람과 사래는 주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분명했기 때문에 또 나름대로 적용한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자기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아브람의 몸에서 자녀를 낳자고 제안했고 아브람은 그렇게 했다. 이때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년 후라고 한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가 75세였으니 지금은 85세가 넘었다.

문제는 하갈이 임신하면서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면서 불거진다. 당연히 사래는 조선 사대부 부인들처럼 아브람과 하갈의 첫동침부터 하갈을 씨받이로 철저히 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람은 자기 몸에서 상속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기쁨에 하갈을 씨받이로만 대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브람의 총애로 하갈은 교만해졌다. 결국 사래는 하갈의 임신으로 불임의 원인이 사래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되자, 여종 하갈을 씨받이를 쓰자고 자신이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질투하게 되고 바가지를 긁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아브람은 사래에게 하갈을 원래대로 종취급하라고 발뺌을 하고 만다. 결국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고 배부른 하갈은 사래로부터 도망친다.

주하나님의 사자는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하갈에게 한 샘물가에서 나타나신다. 주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가 복종하라고 명한다. 주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에게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라고 약속하며 그 증표로 득남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 곧 ‘주하나님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라고 지으라고 하셨다. 이렇게 주하나님께서는 하갈을 살피셨다. 주하나님께서 하갈을 보살피신 샘물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갈은 주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람의 아들을 낳는다.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불렀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세라고 한다.

// 아브람과 사래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잘못된 적용은 화목이 아니라 서로 대항(불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갈과 사래와의 질투 – 아브람과 사래와의 불협 – 하갈에 대한 사래의 학대는 결국 하갈에게서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사는 이스마엘이 태어나게 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하갈과 사라를 신약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하갈이 온전히 씨받이 역할을 하고 주인 사래에게 순종했다면  주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가셨을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치유하시지만, 잘못된 적용은 화목이 아니라  불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아브람은 자신의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혹 상속자입니까? 라고 주하나님께 물었듯이 사래의 제안에 대해서도 주하나님께 물었어야 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도, 반복되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방법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 묻고 인내해야 한다. 바르게 순종해야 한다. 나의 신앙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 치유는 댓가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