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

14장을 읽으면서 아브람과 천지의 주재 지극히 높은신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졌다고 묵상했다. 이 후에 주하나님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한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비록 엘람왕의 연합군을 따라가 무찌르고 잡혀간 롯을 구해왔지만 네왕과 다섯왕의 싸움을 보면서 아브람은 두려웠을지 모른다. 아니 이전부터 그랬었기에 아브람도 아모리 족속 마므레 에스골 아넬 형제들과 동맹을 맺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하나님은 아브람이 동맹을 맺어야 할 사람이 아모리 족속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주하나님이시라고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하나님께서 친히 주변 왕들로부터 지켜주시겠다고 (방패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상속자(큰 상급)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아브람은 자식이 없는 자신에게 상속자를 주시겠다니 무슨 뜻입니까? 라고 주하나님께 되물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아뢴다. ‘도움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면 되겠습니까? 제게 자식이 없으니 가솔 중의 한명을 상속자로 삼으면 되겠습니까? 라고 주하나님께 되묻는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 라고 대답하신다. 그리고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셔서 하늘의 뭇별을 보게하시며 아브람의 자손이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하신다. 아브람은 주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주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다.

(주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아브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셨을 것이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땅을 아브람에게 주시기 위해 아브람을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하신다. 이 땅은 지금 아브람이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 아모리 족속 마르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이겠으나, 개인적으로 이 땅을 아브람이 믿음으로 순종하고 있는 바로 그곳이라고 적용해본다. 장소보다 아브람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저자는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냈다 라고 말하는 대신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기록하는 것은 아닐까?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우르에서 아브람을 이끌어 내셨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주하나님께 아브람이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묻는다. 주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제사를 준비하게 하신다. 아브람은 순종한다. 아브람은 쪼개지 않은 제물을 준비한다. 솔개가 제물을 건딜지 못하도록 지켰다. 해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아브람에게 임하였다고 한다. 주하나님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한 것이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밤하늘의 별도 보았는데 다시 해질 때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주하나님과 아브람의 대화는 몇날 몇밤이 계속되었던 듯하다. 꿈인지 생신지.

주하나님은 환상 중 말씀이 아니라 흑암과 두려움으로 친히 아브람에게 오셔서 말씀하신다. 아브람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무려 사백년동안 그들을 섬긴 후에야 아브람의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아브람은 장수는 하겠지만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고 아브람의 자손이 사대만에 (당시는 한세대가 100년이었나?) 이땅에 돌아올 것이라고 하신다. 지금 아브람이 동맹을 맺고 거주하는 땅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차지 않았다고 하신다. 아브람은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브람은 쪼개지 않은 제물을 준비했는데 주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주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아브람이 불로 응답받은 갈멜산의 엘리야 선배다.) 이렇게 약속은 공증되었다.

주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 곧 애굽강에서부터 유브라데강까지를 주시겠다고 아브람과 언약을 세웠다. 겐, 그니스, 갓몬, 헷, 브리스, 르바, 아모리, 가나안, 기르가스, 여부스 족속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400년 후 가나안 일곱족속보다 많은 열족속이 열거된다.

// 주거니 받거니. 아브람은 주하나님과 술이 아니라 대화를 주고 받는다. 나름 주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생각으로 적용하지만 아브람은 주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이것이 의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곧 듣고 순종하는 것이 의다.

창세기 14:13-24

아브람은 롯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연합군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 아브람은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근처에 거주하고 있었다. 창세기 저자는 아모리 족속 마므레는 에스골과 아넬의 형제라고 밝히는데 아브람은 이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창세기 저자는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소돔과 고모라를 치기 위하여 아모리 족속도 쳤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인 마므레 에스골 아넬 형제들의 도움도 받았을 수 있겠다.

하여간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사병 삼백십팔명을 거느리고 추격했다. 결국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조카 롯과 롯의 재물과 롯의 가솔들을 다 찾아왔다.

아브람이 롯을 구하고 소돔/고모라가 빼앗겼던 모든 재물을 찾아오자 도망쳤던 소돔왕이 나와 아브람을 영접했다.  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조주를 가지고 나왔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하였고 아브람은 전리물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소돔 왕은 아브람에게 감사의 뜻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을 돌려 받고 소돔에게 속하였던 모든 전리품은 아브람에게 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아브람은 소돔 왕의 계산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돔 왕에게 속한 것은 티끌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아브람은 소돔 왕 덕분에 치부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를 거부했다. 대신 아브람은 소돔 왕에게 사병들과 아브람을 도와 준 마므레, 에스골, 아넬 형제들이 참전한 비용만 부담하라고 한다.

// 천지의 주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멜기세덱은 살렘, 곧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으로 천지의 주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된다. 제사장은 창세기에 처음 나오는 단어다. 결론적으로 제사장은 제단에서 일하는 사람일 것이요, 제단은 제사드리는 곳이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들의 기도가 향기로 드려지는 곳이라고 했다. 앞에서 아브람이 제단을 쌓을 때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불렀다.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의미다. 뭘 구했다는 의미보다는 감사와 찬양을 올렸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창세기 저자가 멜기세덱을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멜기세덱이 (아브람보다) 하나님과 더 친밀한 사귐을 나누는 (제단을 더 자주, 규칙적으로 쌓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평강의 땅에 살면서 의의 왕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전장에서 막 돌아 온 사람들에게 떡과 포도주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멜기세덱은 전장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필요를/사정을 알고 채울줄 아는 의의 왕이었다. 의는 창세기를 시작하면서 적용했듯이, 하나님의 성품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닮아간다.

천지의 주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멜기세텍을 만나고, 아브람의 천지의 주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의 사귐은 한단계 깊어진다. 성도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실패를 통해서도 성장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의로운 성도들을 만나면서도 성장한다. 규칙적으로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장한다. 하나님나라의 제사장으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를 알고 채울줄 아는 삶을 살게 하소서.

창세기 14:1-12

시날 왕? 바벨 성읍을 쌓으려고 했던 곳을 차지한 왕인가? 하여간 시날 왕, 엘라사 왕, 엘람 왕, 고임 왕이 요단 지역 소돔 왕, 고모라 왕, 아드마 왕, 스보임 왕, 소알 왕과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여 한판 붙었다. 창세기 기자는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십이년 동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13년에 배반하자, 엘림 왕 그돌라오멜이 시날, 엘라살, 고임 왕들과 더불어 르바, 수스, 엠, 호리 , 아말렉, 아모리 족속을 치면서 엘림 왕에 대항해 반기를 든 소돔, 고모라, 아드마, 소알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싸움은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연합군이 이겼다. 합종책을 이끌었던 소돔왕과 고모라 왕은 도망했고 연횡책을 주도한 엘람 왕의 연합군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았다. 당시 소돔에 거주하고 있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재산을 노략당하고 포로로 잡혔다.

// 아브람 시대에도 합종연횡이 있었나보다. 작은 나라끼리 힘을 합해 큰 나라에 대항하거나, 큰 힘으로 이웃들을 하나 하나 포섭해 각개격파하여 합종을 깨뜨린다. 세상은 이렇듯 자신들의 유익에 따라 이합집산을 밥먹듯 한다. 이것이 세상의 역사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의 힘을 이용하셔서 주하나님앞에서 악하며 큰 죄인이었던 소돔을 일차적으로 벌하신다. 주하나님 앞에서 악하며 큰 죄인이었던 소돔으로 거주지를 옮긴 롯은 이 재난을 피할 수 없었다. 물과 꼴이 풍부한 에덴 동산 같고 애굽의 나일 평야 같은 요단지역이었지만 제단을 쌓지 않으면, 곧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으면 진흙탕 싸움(이전투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가 되지 않도록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소서.

창세기 13

아브람은 애굽에서 나와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갔다. 창세기 저자는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다고 기록한다. 하여간 아브람은 천하의 장사꾼이었나보다. 예순이 넘은 아내 사래도 바로에게 비싼 값이 팔았다가 환불 없이 사래만 돌려받았으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아브람은 처음 쌓았던 벧엘과 아이사의의 제단에 이르러, 거기서 주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안전하게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신 주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기근을 피해 남방으로 애굽으로 내려갔다 왔으니 몇년은 지났을 것이다.

아브람과 동행한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었다. 그런데 소유가 많은 아브람과 롯이 머무는 땅은 두 집안이 동거하기에는 넉넉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곳은  이미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 아닌가? 자연스레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고, 아브람은 롯에게 우리는 한 친족이니 서로 다투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롯에게 분가하라고 명령한다. 대신 땅을 선택할 우선권을 롯에게 주었다.

롯이 눈을 들어 본 결과, 온 땅에 물이 넉넉한, 조상 대대로 들어온 에덴 같은, 그리고 (짧은 경험이었겠지만) 애굽의 나일 평야 같은 요단지역을 택하고 아브람을 떠나 동쪽으로 옮겼다. 롯은 요단 지역의 도시들에 머물렀다고 한다. 가축을 치며 살던 유목민 롯이 도시 생활에 빠져 소돔까지 이르렀다. 창세기 기자는 소돔사람은 주하나님 앞에 악한 큰 죄인이었다고 평가한다. 도시의 유혹은 강하다.

한편 아브람은 가나안에 그냥 머물렀다. 롯이 떠난 후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아브람이 있는 곳에서 북남동서 사방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브람이 보는 땅을 아브람과 아브람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셨다. 아브람의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이 밟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아브람은 장막을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로 옮겨 그것에 거주하며 거기서 또 주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 계시록을 읽을 때 제단, 곧 하늘 성전의 제단은 성도들의 기도가 향기로 하나님께 올려지는 곳으로 묘사된다. 다시말해 제단은 하나님과 대화(기도)하는 곳이다. 제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성도들의 눈으로 하나님의 길을 보게 하신다. 눈을 들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보는 제 눈을 감겨주시고 하나님께서 제 눈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소서. 아멘

창세기 12:10-20

주하나님이 가라는 곳이 꼭 좋은 곳만은 아니다. 주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람이 이주한 가나안에도 기근이 든다. 그것도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다고 한다. 아브람이 점점 남방으로 내려간 이유가 바로 기근일 것이다. 아브람은 결국 나일 평야가 있는 애굽까지 내려갔을 것이다.

아브람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내 사라에게 말한다. 예순이 넘은 아내에게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얼마나 로맨틱한 표현인가. 그러나 아브람이 이렇게 말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해야 자신이 안전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심보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브람 일행이 애굽에 이르자 정말로 애굽사람들이 사래의 아리따움을 보고 반했다. (화장발인가? 아니면 이국적인 외모나 얼굴색이 달라서… 아브람이 75세에 하란을 떠났다면 사래는 적어도 65세였을 것이다.) 바로의 고관들에게 그소식이 퍼졌고 고관들이 바로 앞에서 공공연히 이국에서 온 아리따운 여인 이야기를 하자 바로는 사래을 바로의 궁으로 데려가고, 아브람에게는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댓가로 주었다. 한마디로 사래가 바로에게 팔린 것이다.

그러나 주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어야 할 아브람을 위해 바로와 바로의 집안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무슨 재앙일까?) 바로는 아브람을 불러서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어찌하여 사래가 너의 아내라고 말하지 않고 누이라고 말하고 나에게 아내로 주었느냐고 호통?을 치며 아브람에게 네 아내를 도로 데려가라고 하였다. 바로는 수하사람들에게 아브람이 아내 사래와 모든 소유를 가지고 안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명하였다.

아브람도 영락없는 아담의 후손이다. 아내를 핑계거리로 삼는다. 그러나 불순종의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혀주시고 주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하게 하셨듯이, 주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의 부부관계를 지켜주셨다.

//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아브람이 어쩌다 하나님이 아닌 아내 사래로 말미암아 안전을 담보하고 목숨을 보존하고자 했을까? 주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온 가나안 땅의 심한 기근이 불신으로 이끌었을까? 이 사건에서 우리는 아브람의 믿음이 완전했다기 보다는 여전히 믿음의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브람도 처음부터 믿음이 완전했던 것이 아니었다. 불순종의 경험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쌓여가면서 믿음이 온전해져 갔다. 하물며 우리랴. 불순종은 회개하고 말씀에 대한 순종을 쌓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