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31~12:9

데라의 족보는 ‘낳고 죽었다’로 간단하게 기록되지 않는다. 가정을 세우고 가정을 이끄는 족보다.

데라는 아들 중 아브람 부부와 일찍 죽은 하란의 아들, 곧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출발한다. 가나안으로 가던 데라는 국경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데라는 끝내 하란에서 생을 마감한다.

데라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왜 둘째아들 나홀의 가정은 함께 가지 않았을까?

데라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가 죽기전에 태어났다. 당연히 노아로부터 직접 노아와 동행한 하나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데라가 하나님과 동행했을리는 없다. 데라가 죽은 후에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을까? 주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리에서 불순종의 삶을 살고 있던 데라에게도 동일한 명령을 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이미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동일한 명령을 하셨고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하란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나홀은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동의하지 않고 갈대아 우르에 남았을 것이고 노구의 데라는 아들  아브람을 따라 억지로 하란까지는 왔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가안안 땅으로 가는 경계를 넘지 못하고 하란에서 버티다 (불순종하다) 죽었을 것이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고향 – 갈대아 우르, 친척 – 나홀 가정, 아버지의 집 – 하란/데라: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때 데라가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겠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고 축복하셨다. 아브람에게 복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주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장면은 아담과 노아에게 복을 주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릎을 꿇게 하시고 주하나님께 충복하도록 ‘하나님나라 기사작위’를 수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임명하시는 것이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온 땅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온 땅을 축복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를 주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축복하시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주하나님도 불순종하는 자로 저주하시겠다고 하신다.

아브람은 주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 (순종했다). 하란까지 함께 왔던 롯도 아브람과 동행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다고 한다.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보여주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종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출발했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히브리서 저자가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고 기록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가야할 곳이 가나안이라는 것을 몰랐다기 보다는, 주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가나안이 어떤 곳인지,  주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람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어떻게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며, 어떻게 아브람으로 하여금 창대케 하시며, 어떻게 아브람이 복이되게 하실 지 몰랐다는 뜻일 것이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주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다. 아브람은 주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곳에다 제단을 쌓았다. 첫 제단은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쌓았다. 제단은 주하나님의 축복/약속에 대한 사람의 마땅한 반응이다. 주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다. 아브람은 벧엘 동쪽, 아이 서쪽 사이로 옮겨 (여호수아서를 읽을 때를 기억하면 가나안 정 중앙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주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주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창세기 기자는 기록한다.  에노스 때 사람들이 주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후 오랜만에 나오는 표현이다. 다시말해 아브람때 와서 다시 주하나님과 (규칙적으로, 본격적으로) 교제하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이다. 아브람은 점점 남쪽을 향해 옮겨갔다.

// 믿음으로 아브람은 주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믿음은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믿는다’는 동사가 따로 있겠지만 오늘은 ‘믿음’은 명사형이고 ‘순종’이 믿음의 동사형이라고 적용해 본다.

사족: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죽은 후 에녹을 눈으로 직접 본 마지막 세대 다음 세대에 태어났다. 아브람도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가 죽은 후 노아를 눈으로 직접 본 마지막 세대 데라의 아들이다. 에녹을 본 사람들이 (아담을 포함), 노아를 직접 본 데라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에녹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노아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브람이 믿음으로 순종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들음’이란 ‘듣고 순종함’이다.

 

창세기 11:10-30

바벨 사건 이후 셈의 족보가 이어진다. 셈은 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 그후 오백년을 더 살며 자녀를 낳았다. 셈 – 아르박삿 – 셀라 – 에벨로 이어지는 족보를 보면  홍수 후 바벨에서 세상이 나뉘었을 때인, 곧 에벨에게서 벨렉이 태어나기까지 101년 정도의 시간의 흘렀다. 방주에서 구원받은지 1세기만에 사람들 모두 한가지 언어로 하나님께 대적했던 것이다. 노아가 홍수 후에 삼백오십 년을 더 살았으니 노아도 당연히 바벨의 현장에 있었을 것이다.

셈의 족보는 계속해서 벨렉 – 르우 – 스룩 – 나홀 – 데라로 이어진다. 이 데라가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셈의 족보는 여기서 끝나고 데라의 족보가 이어진다. 대충 년도를 따져보면 노아는 분명  데라 때까지 살아 있었을 것이다. 아브람은 노아가 죽은 후 태어났다.

데라의 족보는 데라가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은 것으로 시작한다. 하란은 데라보다 일찍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다고 한다. 아브람은 이복여동생 사래와, 나홀은 일찍 죽은 하란의 딸 밀가와 각각 장가들었다. 하란에게는 롯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밀가와 이스가라는 딸이 있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임신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다고 한다.

// 왜 데라의 아들 아브람에서 족보가 갈라지지 않고 굳이 데라에게서 족보가 새로 시작할까?  홍수 이야기의 주인공 노아를 생전에 만난 데라, 아니 하나님과 동행이 무엇인지 경험했던 노아와의 연장선상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은 창세기 저자의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란은 데라의 막내 아들? 하란은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 족보상 하란은 아브람과 나홀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름이 나오지만 육신의 장자일 수 도 있겠다. 하란의 아들 롯이 아브람과 동행하고 딸 밀가가 삼촌 나홀과 결혼을 한 것도 하란이 육신의 장자였다는 것을 뒷받침하지 않을까?  뇌피셜이다.

데라 족보의 또다른 특징은 2장 천지족보에서 아담과 하와가 가정을 이룬 것을 기록한 이후  중단되었던 가정을 이루는 이야기가 다시 등장한다는 것이다. 짧은 데라 족보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데라는 이것을 알았기에 아들들을 근친상간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는 가계내 결혼을 시켰다. 이 전통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며느리를 찾을 때도 이어진다.

홍수후 사람들은 족속과 언어와 나라로 흩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 동행을 경험했던, 방주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던 노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리라고 축복한 셈의 후예를 중심으로 교제를 이어가신다. 그 새로운 시작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다. (아브람의 족보는 신약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로 이어질 때까지 아낀다.)

창세기 11:1-9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단순히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의미보다는 한통속이었다는 뜻이 아닐까? 셈과 야벳이 생각하는 바가 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하나님의 평가는 노아 가족과 후손 모두에게 적용된다.

노아와 세 아들들은 아마도 아라랏산지에서 내려와 동쪽으로 지경을 넓혀갔을 것이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시날 평지를 만나자 그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 통속이었던 이들은 함께 살고자 큰 성읍을 만들고 탑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노아 아들들에게 말씀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의 명령에 대한 거부다. 노아의 아들들은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라며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기를 들었다.

주하나님은 사람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주하나님은 사람들이 한 족속(가족)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겠다고 하셨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을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삼위 하나님은 친히 내려오셔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서로 알아 듣지 못하게 하셨다. 창세기 저자는 10장에서 셈-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언급하면서 벨렉 때에 언어가 나뉘었다고 한다. 그래서 10장에서와 같이 노아의 세 아들들과 자손들은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흩어졌다.

주하나님은 사람을 흩으심으로 사람들이 온 땅에 충만할 수 있도록 하신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 완전히 선다.) 사람들이 세우려던 성읍 이름이 바벨이요, 그곳에 세우려던 탑이 바벨탑이다. 바벨은 주하나님께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는 뜻을 갖는다.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진 사람들이 세우려고 했던 성읍의 이름을 후대 바벨론은 그대로 가져다 쓴다.

// 바벨 사건은 노아가 아직 살아 있는 때 일어난 일이다.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족보 첫머리를 장식했던 노아도 어쩔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대신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려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을 하나님은 흩으셨다. 우리는 잠언의 말씀대로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 완전히 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 하나될 것이다.

(왜 창세기 저자는 굳이 주하나님이 내려오셨다고 기록할까?)

창세기 10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다. 노아의 아들들은 홍수 후에 자녀를 낳았다. 창세기 저자는 야벳의 아들들부터 기록한다.

야벳의 아들(후손)들로부터 여러 나라와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물렀다고 한다. 바벨사건을 기록하기 전에 언어가 나뉠 것을 언급한다. 함의 자손 중에는 사냥꾼 니므롯을 제외하면 당연히 가나안이 눈길을 끈다. 가나안은 신돈, 헷, 여부스, 아모리, 기르가스, 히위, 알가, 신, 아르왓, 스말, 하맛 족속을 낳았다고 한다. 브리스 족속이 빠졌지만 자연스레 가나안 땅 일곱족속들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들 역시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 나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셈의 아들들이 기록된다. 셈의 후손 중 에벨이 두 아들을 낳았을 때 세상이 나뉘었다고 창세기 저자는 토를 단다. 마찬가지로 셈의 자손도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 나뉘었다. 이 노아 자손의 족보로부터, 곧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이 땅의 백성들이 나뉘어 퍼졌다.

// 9장에서 노아의 세 아들은 저주 받은 함과 하나님을 찬송하리라는 셈과 야벳 장막으로 나뉜다. 가인과 셋(아담) 족보가 달랐던 것 처럼, 함의 자손과 셈과 야벳의 자손의 족보도 조금 다르다.  가인의 족보에는 성읍을 건설하고 예술인과 장인의 조상이 언급된다. 곧 문명의 발전을 언급하는데 셋의 족보에는 출생과 죽음 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함의 족보에는 사냥꾼 니므롯, 큰 성 레센의 건설이 언급되지만 야벳과 셈의 족보에는 자손을 낳은 것만 기록된다. 하나님의 축복과 세상에서 명성을 얻거나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세상에서의 명성이나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 없는 자들이 하나님 대신 내 세우는 우상과 같은 것이다.

노아 세 아들들의 족보에는 아담의 족보와 노아의 족보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기록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홍수 후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 부터 악하다는 것이 노아 세 아들의 족보에서부터 드러난다. 홍수에서 구원받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불순종의 결과인 죽음의 지배를 받는다. 성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다.

창세기 9:18-2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는 포도농사를 시작했고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하여 (무엇이 노아로 하여금 취하도록 포도주를 마시게 했을까? 그것도 혼술로. ㅠㅠ)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있었다. 노아의 아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노아의 하체를 보고 나가서 그의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셈은 야벳과 옷을 가지고 뒷걸음 쳐 들어가 노아의 하체를 덮고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고 취한 함의 행동과 셈과 야벳의 행동은 아담과 하와가 벌것벗음으로 두려워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방주를 지어 홍수로부터 구원을 받은 노아지만, 불순종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 같은 완전한 존재로 회복(재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아도 결국 구백 오십 세가 되어 죽었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은 모든 사람을 죽음아래 있게 만들었다.

하나님과의 동행에 취하지 (즐거워하지) 않고 방심하는 순간, 노아는 포도주에 (스스로의 성취?에) 취하게 되었고 술취한 노아의 벌거벗음은 함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악’을 맛보게 했다. ‘악’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하나님은 정녕 (반드시) 죽으리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속삭이지 않는가? 자초지종을 안 노아는 함에게 가나안은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을 것이며) 셈과 야벳을 섬겨야 한다고 저주한다. 그러나 셈은 야벳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죄를(가나안을) 다스리라고 축복한다.

노아의 술취함은 아들 삼형제를 둘로 갈라 놓는다. 한몸을 이루어야 할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핑계를 대는 사이가 되었고, 아담과 하와에서 태어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한 것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하셨나보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없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인 ‘선’을 배울(닮을)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해 가면서 ‘선’을 배워가야 한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곧 ‘선’임을 깨달아야 한다. 반대로 하나님 없이 행하는 것이 ‘악’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없이도 즐거움에 취하는 것이 악이 아니면 무엇이랴.

벌거벗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한 시인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벌거벗음이 두려움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일 것이다. 벌거벗음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안기는 수 밖에 없다.

^^ 1월 13일 추가: 문제는 요즘 사람들은 벌거벗음을 드러내려고 한다. 부끄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수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벌거벗음이 수치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교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