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9:1-17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고 복을 주신다. 첫 사람 아담에게 복을 주셨듯이 (생기를 불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을 사람작위를 주신 것이라고 이해했다.) 노아와 노아의 아들들에게도 ‘사람작위’를 주셔서 하나님께 충복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작위’는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사람작위를 주시며 첫사람 아담에게와 같은 사명을 주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육식을 허락하시면서 그 고기를 그 생명이 되는 피채 먹지 말라고 명하신다. 특별히 살인을 금하시면서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제 하나님은 노아와 그와 함께 한 노아의 아들들과 언약을 맺으신다. 하나님이 갑이 되시고 을은 노아와 노아의 후손들, 방주에서 구원받은 모든 생물이다. 갑이신 하나님은 다시는 을인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땅을 멸할 홍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무지개를 그 증거로 주신다. 무지개가 언약에 대한 갑의 싸인이라고 하신다.  이 짧은 본문에 ‘언약’ 언약이라는 단어가  일곱번이나 반복된다.

// 갑이신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의 증거를 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생물인 을을 대표하여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사람작위를) 주셨다. 사람이 모든 생물을 대표할 수 있는 이유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당연히 하나님께 충성하고 복종해야 한다. 8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신다. 이 언약관계가 성도에게 주어진 영생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후손들에게 무지개로 싸인하셨다면. 우리 성도들에게는 더 확실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싸인하셨다.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의 증거를 주신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신다. 언약안에 살라고 하신다.

창세기 8

방주 밖의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고 방주 안의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은 다 살았다.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다.

백오십 일 후에 물이 줄기 시작했고 비가 그쳤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라고 8장을 시작한다. 바람은  자연적인 현상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기도 한다. 창세기 기자는 에덴 동산에서 주하나님이 거니시는 소리를 바람으로 표현했었다. 포악한 자들이 다 죽은 후 땅에 다시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이) 거니시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이다.

일곱째 달에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달에는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봉우리가 보인지 사십일이 지난후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놓아 땅이 말랐다는 것을 확인했다. 비둘기가 돌아오자 칠일 후 다시 비둘기를 내놓았고 저녁에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다. 다시 칠일 후 비둘기를 내놓았으나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다. 노아 육백일 년 첫째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혔다. 방주의 문은 하나님이 닫아 주셨는데, 얼마나 궁금했을까?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지면을 보았다. 물이 다빠졌다. 그래도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방주에 머물렀다.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노아에게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있는 생물을 이끌어 내어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노아와 노아의 아들과 아내와 며느리, 그리고 방주 안에 있던 모든 생물이 방주에서 나왔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제일 먼저 주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를 드렸다. 주하나님께서 번제의 향기를 받으시고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을 아신다고 하신다. 그래서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는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땅이 있을 동안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계속될 것이라고 하셨다. 창조세계가 주하나님이 섭리하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절기와 기후와 계절과 주야의 변화로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 15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읽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하나님은 절기와 기후와 계절과 주야의 변화로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자연만물을 봐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니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하나님의 말씀만한 것이 없다. 성서의 기록은 노아도 누리지 못한 성도들의 특권이다.

창세기 7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1)

방주로 초대받은 유일무이한 노아가족. 초대받은 이유는 노아가 자기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주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에게서 주하나님은 의로움을 보셨다고 한다. 다른 이유를 토달지 않는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따라서 주하나님이 노아에게서 의로움을 보셨다는 것은 노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지으신대로 정직했다는 뜻이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닮아갔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창세기 기자는 다시한번 노아가 주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기록한다. 노아가 육백세 때 홍수가 일어났다. 노아 나이 육백세에서 갑자기 스치는 생각은

5장 아담족보에 의하면 노아는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육백세에 홍수가 났으니 홍수나기 120년 전에 노아는 480세 정도 였을 것이다. 증조부 에녹을 좇아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는 어쩌면 자신도 하나님께 데려감을 입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때까지 독신으로 산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이 노아를 하나님께 데려감이 아니라 방주를  지어 생명을 보존하는 것임을 깨닫고 결혼하고 세 아들을 낳았을 것 같다.

방주에 들어간  칠 일 후에 홍수가 시작되어 사십주야 비가 땅에 쏟아졌다. 방주의 문은 주하나님께서 직접 닫으셨다고 한다.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다.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은 다 살아 남았다. 물은 백오십 일 동안 땅에 넘쳤다.

//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과 노아의 삶은 다르게 진행된다. 똑같지 않다. 한명은 데려가시고 한명은 생명보존을 위해서 땅에 두신다. 내가 걷는 믿음의 길도 믿음의 선진들과 똑같이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데려감을 입든, 방주에서 보호를 받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사는 삶도 같은 듯 하지만 다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다양함 가운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임마누엘뿐이다.

창세기 6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창세기 1장 28절 주하나님의 축복(명령)이 이루어지는 듯한 뉘앙스다. 그러나 문제는 번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로 세상은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난제다. 쉽게는 앞에 나온 두 족보를 따라 사람들에게서 난 딸(자녀)들은 가인의 후손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자녀)들은 아담(셋)의 후손들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명확하지 않은 것은 넘어가자. 대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하고 순종하는) 존재들일 것이고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존재들일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당연히 아들과 딸은 자녀들을 뜻할 것이다.) 결혼하면서 생긴다. 영이신 주하나님은 주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육신으로 지음받은 자녀들과 함께 하신다. 그런데 주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녀들이 주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과 한몸을 이룸으로 더 이상 주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된 상황이다. 주하나님은 주하나님께 충성하고 복종하라고 ‘사람’이라는 작위를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게 하셨는데, 사람들이 생령(사람)되기를 포기하고 그냥 육신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하나님은 120년이라는 기한만 사람과 함께 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의 자녀들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고대문명을 이루어내었지만 주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죄악으로) 살고있고, 사람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이 항상 하나님 없이 진행되는 것을 보셨다. 주하나님께 충복하라고 무릎꿇게 하시고 ‘사람’작위를 주셨건만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고 말았다.

주하나님은 주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실 계획을 세우신다. 노아 이전 세대들은 모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께 데려감을 보았으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길 원치 않자 사람들을 쓸어버리실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에녹이 하나님께 데려감을 받은 후 태어났지만 증조부 에녹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양이다. 에녹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노아 역시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런 노아로부터 새로운 족보가 시작된다. 창세기 기자는 노아가 주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소개한다. (주하나님과의 동행은 주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결과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으나 하나님과 동행한 또 다른 의인 노아에게는 주하나님께서 또 다른 계획으로 일하신다.

창세기 기자는 다시 한번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였다고 기록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땅이 부패하였다. 사람(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땅과 함께 포악한 사람들을 멸하시겠다고 알려주신다. 대신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다. 친히 규격까지 알려주신다. 그리고 노아에게 생명을 보존 할 수 있도록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야 말로 생명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혈육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해서 땅과 함께 그들을 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어 노아 가족과 혈육있는 모든 생물의 씨가 마르지 않도록  생명을 보존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주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마음이다.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 하나님니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요, 의인의 삶이다. 주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결과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 성서의 마지막도 주 예수의 은혜를 얘기한다.

창세기 5

아담의 족보다. 아담의 족보는 아담의 시조가 창조주 주하나님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로 지음을 받았다고 분명히 한다.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주시고 사람이라고 불러주셨다. 앞에서 복을 주시고를 ‘행복’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묵상했다. 기사가 왕에게 기사작위를 받듯, 남자와 여자는 주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하나님께 ‘사람작위’를 수여받은 것이다. (사람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생령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작위를 받았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을 뜻으로 ‘사람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 기사가 왕에게 충복하듯, 사람은 주하나님께 충복하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다. 이렇게 아담의 족보는 시작한다.

아담 족보는 가인의 족보와 다르게 건축가든 예술가든 장인이든 새로운 문명의 조상이 되었다는 언급이 없다. 대신 에녹 때에 와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한다. 930에 죽은 아담의 경우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시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어도 에녹과도 함께 살았을 것이다. 노아는 에녹과 겹치지 않지만 노아 이전의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시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것 외에 아담의 족보는 후손들에 대해 누가 무엇을 했는지 토를 달지 않는다. 다만 노아 이름이 안위라고만  주석을 단다. 다시말해 아담의 족보는 세상에서 무엇을 했느냐를 자랑하는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하는 족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의 족보는 일단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은 것에서 멈춘다.

// 아담의 족보는 죽음의 족보처럼 보인다.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다. 셋도 죽었다. 천년가까이 살아도 불순종의 결과는 정녕 죽는 것이었다. 단 한명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에게는 죽었다라는 문구 대신 하나님 데려가셔서 세상에 있지 않았다라고 한다. 영생은 하나님과 동행함이라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교훈하는 방법이다. 하나님과 동행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다. 임마누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