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6:9-43

에서의 족보가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자 이삭의 아들 에서도 번성하게 하신다. 에서의 아들들로부터 나온 족장은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에서 일곱족장, 르우엘의 자손에서 네 족장, 오홀리바마에게서 낳은 세 족장으로 창세기 저자는 총 열네 족장의 이름을 열거한다.

창세기 저자는 에돔/에서 자손들이 차지한 세일 땅 주민 호리 족속의 일곱 족장들에게 대한 이야기도 삽입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국설립 이전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의 이름에 대해서도 기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서에게서 나온 열한 족장이름을 열거한다.

// 15-19절에보면 에서의 아들로 족장이 된 14명의 족장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마지막에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 11명의 새로운 족장의 이름을 열거하며 에서의 족보를 마친다. 열두 아들의 야곱과 차등하기 위해 11족장으로 줄인 것은 아닐까? 또 세일에 살던 호리 족속도 에서의 족보에 포함시킨다. 14절과 25절을 통해 에서와 호리 족속은 통혼으로 하나의 집안으로 통일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에서는 세일 땅을 에돔 땅으로 만들었다.

이삭과 야곱은 모두 가나안 여인이 아닌 고향 여인과 결혼을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나안 여자를 며느리로 삼을 수가 없었다. 이삭도 에서를 피해 도망가야하는 야곱에게 가나안 여자대신 밧단아람에서 아내를 맞으라고 했다. 그러나 이삭도  야곱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리브가와 라헬로 인해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했다.

(훗날의 평가겠지만) 에서는 세일 땅 호리 족속을 에돔화하는데 성공했는데, 야곱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께서 다스리심’ 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밧단아람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창세기 저자는 에서 족보의 최종 스코어를 11이라고 한다. 세상은 결코 하나님나라 백성을 이길 수 없다는 암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셨다. 성도들에게 너희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성도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내가 부, 명예, 건강 등등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결국 임마누엘이다. 언약 안에 거하는 것이다. 세상 족보가 아니라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다.

창세기 35:23-36:8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았다. 레아에게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블론을, 라헬에게서 요셉과 베냐민을, 라헬의 여종 빌하에게서 단과 납달리를, 레아의 여종 실바에게서 갓과 아셀을 낳았다. 모두 밧단아람에서 낳았다.

야곱은 벧엘을 떠나 헤브론에 있는 이삭에게로 갔다.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세, 야곱도 백이십세가 된 때다. 이삭이 죽자 에서와 야곱이 이삭을 장사했다.

36장은 장자의 명분을 판 형 에서의 족보로 이어진다. 에서는 가나안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아내로 맞이하고 (26장에는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하는데…)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했다. 에서는 자녀들을 가나안 땅에서 낳았다. 그런데 에서는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가축과 짐승과 재물을 이끌로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창세기 저자는 토를 단다. 에서가  세일 산으로 가서 그곳에 거주하며 에돔의 조상이 되었다.

// 가나안 땅을 지키던 에서는 가나안 땅에서 낳은 자녀들을 데리고 세일로 떠났고 밧단아람에 갔던 야곱은 그곳에서 열두 아들을 낳아 (베냐민은?) 가나안 땅에 돌아와 정착하게 된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에서가 가나안에서 맞이한 두 아내의 이름이 26장과 다르다. 창세기 저자가 졸았나? 26장에서 가나안 여인을 모두 헷 족속이라고 했는데 36장에서는 헷족속과 히위족속의 딸이라고 한다. 28장에서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 마할렛을 아내로 맞았는데 36장에서는 이름을 바스맛이라고 바꿨다. 바스맛은 가나안 헷족속 엘론의 딸의 이름이었다. 덧붙이고 뒤섞이고… 그만큼 에돔의 족보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일까?

롯이 아브라함을 떠났듯이 이번에는 에서가 야곱을 떠났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야곱도 약속의 땅에 머물게 하신다. 롯은 평야를 차지하고자, 에서는 넓은 사냥터를 차지하고자 떠났고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두셨지만 야곱에게는 약속에 땅에 머물게 하셨다. 아브라함의 손자, 이삭의 아들 에서도 이 땅에서는 풍족한 소유를 누렸다. 그러나 결국 언약에 머물러 있지 못했다. 소유의 풍부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파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심령을 채우기 위해 나의 소유 전부를 팔아서라도 보화가 묻힌 밭, 값비싼 진주를 사야 한다.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라고 하신다.

창세기 35:1-22

(두려움에 떠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신다. 벧엘로 가서 거하라고 하신다. 벧엘로 가서 에서를 피해 도망갈 때 만났던 하나님께 제단을 다시 쌓으라고 하신다. 다시말해 벧엘의 서원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라고 말했다. 세겜에 머무는 동안 야곱 집안 사람들은 이방신상을 따르고 이방 의복을 입었다. (이방문화에 젖어버렸다.) 세겜에게서 노략한 폐물로 귀고리를 만들 찼었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을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이방신상과 그것들을 세겜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벧엘로 떠났다.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이 야곱이 가는 길을 보호했다. 따라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들이 없었다. 야곱과 가솔들은 모두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도착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 곧 ‘하나님의 집에 (계시는) 하나님’ 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기자는 잠시 장면을 바꾼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자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했다. 리브가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 (통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창세기 기자는 야곱이 벧엘로 돌아와서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야곱을 얍복강가에서 씨름하면서 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셨다. 그리고 아브라함때부터 맺으신 언약을 확인시켜 주시고서야 이스라엘을 떠나 올라가셨다. 야곱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던 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돌기둥을 제단삼아 제사를 드리고 다시한번 그곳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다.

야곱은 벧엘에서 다시 길을 떠났다. 왜? 하나님은 벧엘에 거주하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아마도 8절 리브가의 유모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리브가와 이삭이 사는 곳을 향해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가는 길에 라헬이 해산하게 되었다. 난산으로 베냐민을 낳고 라헬은 죽었다. 야곱은 라헬을 베들레헴 길에 장사했다. 이스라엘은 다시 길을 떠났다. 이스라엘이 에델 망대를 지난 후 장막을 쳤을 때 장자 르우벤이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했다.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들었지만 본문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야곱에게는 이제 베냐민까지 열두 아들이 있었다.

// 오늘 본문은 한번의 묻어버림과 두번의 장사가 나온다. 첫번째,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야곱은 영적으로 각성했을까? 세겜을 떠나면서 가솔들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고 이방 옷을 벗어버리라고 명했다. 가솔들은 이방신상과 이방 악세서리를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이것들을 세겜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렸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 (서원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의 집을 회복했다. 두번째 리브가가 유모 드보라를 묻는다. 리브가의 속임수는 어쩌면 유모 드보라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야곱에 대한 편애와 속임수. 이 모든 것이 통곡할 정도로 의지했던 드보라의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세번째 야곱이 라헬을 묻는다. 라헬은 아직까지 드라빔을 가지고 있었을까? 라헬로 세겜을 떠날 때 드라빔을 묻었을까? 아마도 여전히 작은 우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라헬이 죽는다.

벧엘로 올라가면서 야곱은 이방신상들을 묻었고, 한편으로 리브가를 통해 야곱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드보라도 묻혔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했던, 그렇지만 하란의 드라빔을 숨겨왔던 라헬도 묻었다. 벧엘로 올라가기전 세겜에서 이방신상들을 버리라는 것은 본문에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하나님의 명령일 수 있다. 야곱은 이에 순종했다. 그러나 하란의 영향을 고스란히 전해 준 유모와 (어쩌면 드보라는 야곱의 유모였을 수도 있다.) 라헬은 야곱이 직접 묻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드보라는 햇수를 채워 데려가시고 라헬은 난산 통해 장사되게 하셨다.

성도들도 자기의 의지로 묻을 수 있은 옛습관이 있겠지만, 우리의 죄와 허물은 우리 스스로 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을 자를 따르는 불순종을 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밖에 없다.(엡2)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작은 부분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사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다.  내가 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친히 데려가시도록 맡겨야 한다.

뭔가 다 묻은 것 같은데도 야곱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묻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임마누엘이 필요하다.

창세기 34:18-31

야곱 아들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여겼다. 세겜은 할례 받기를 지체하지 않았다. 그만큼 세겜이 야곱의 딸을 사랑하였고 세겜은 이미 추장으로 아버지 하몰의 전적인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몰과 세겜은 세겜성읍 문에 성읍 사람들을 모아놓고 야곱가문과 친목하고 서로 통혼하자고 제안한다. 단 야곱 가문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 야곱과 한 민족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몰과 세겜은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서로 통혼해서 한 민족처럼 되면 야곱 가문의 가축과 재산과 모든 짐승이 세겜의 소유가 될것이라며 할례의 조건을 들어주자고 말했다. 성읍사람들도 하몰과 세겜의 말을 듣고 할례를 받았다.

제삼일에, 아직 할례의 통증이 남아 있을 때에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몰래 세겜 성읍을 기습하여 모든 남자를 죽였다. 하몰과 세겜도 죽였다. 그리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다. 야곱의 다른 아들들도 뒤늦게 세겜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다. 노략의 핑계는 세겜 사람들이 누이 디나를 더럽힌 까닭이지만… 그들은 세겜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를 사로잡았다.

(침묵하던)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화를 자초했다고 책망한다. 가나안 땅의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했다고 말한다. 아직 야곱의 가문은 수가 적은데 이 일로 가나안 족속들이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 우리 야곱 집안이 멸망당하지 않겠느냐고 나무란다. 야곱의 아들들은 (시므온과 레위) 세겜이 디나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냐고 아버지 야곱에게 따졌다.

// 사람들의 비즈네스는 사랑과 화평을 말하나 이면은 탐욕과 전쟁이다. 야곱이 아들들이 세겜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으라는 것도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하몰과 세겜이 할례를 받아들인 것도 순수한 마음일 수 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 중 시므온과 레위는 할례를 이용해 보복을 시도하고 세겜을 노략할 계획을 가졌으며, 하몰과 세겜도 성읍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야곱의 모든 소유가 세겜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탐욕을 감추지 않았다. 순수함이 사라지고 탐욕의 지배를 받을 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나만 (우리편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터지자 그동안 침묵하던 야곱도 시므온과 레위에게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라고 온통 자기 입장에서만 호통을 친다. 이 짧은 한절에 ‘나’와 ‘내’가 여덟번이나 사용되었다.

코로나 19를 대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편가르기를 한다. 정치권과 다르지 않다. 화해와 상생 대신 편가르기를 한다면 순수하고 의로운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하여도 그 결과는 불의한 보복에 불과할 것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빼지 않았으면 후에 세겜족속이 야곱집안을 삼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가 있지 않았던가. 야곱은 라반의 위협과 에서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준 마하나님을 또 다시 잊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면 악으로 악을 갚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을 더럽히지 않는 것보다,  내 집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바로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일에 선을 도모하는 것이다.(롬 12:17) 바울만 아니라 베드로도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벧전3:9) 편지한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권면한다. 악인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의인이 행할 바다.

창세기 34:1-17

야곱은 레아에게서 낳은 딸 디나는 그 땅의 딸들을 보러나갔다가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곧 그 땅의 추장 세겜에게 눈에 띄여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세겜은 성폭행은 하였지만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사랑의 마음을 말로 전하고, 아버지 하몰에게 디나와 결혼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야곱은 디나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마도 같이 나간 디나의 여종들이 돌아와서 보고했을 듯 싶다.) 아들들이 목축하러 들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잠잠할 수 밖에 없었다. 지팡이를 의지하는 절름발이 야곱의 한계라고 해야 하나.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에게 딸을 달라고 말하러 왔을 때, 야곱의 아들들도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야곱의 아들들은 근심하고 노하였다. 하몰이 야곱에게 디나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해 달라고 하며, 두 족속이 서로 통혼하자고 제안했다. 동행한 세겜도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에게 요구조건을 다 들어 줄테니 디나를 아내로 달라고 말했다.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요구한대로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야곱의 아들들은 문제 해결보다 누이 디나를 더럽힌 사건에 대한 보복심에 사로잡혀 세겜과 하몰에게 속여 대답했다. “안된다.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누리 누이를 줄 수 없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몰집안 모든 남자가 다 할례를 받으면 통혼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만약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디나를 데리고 떠나가겠다고 대답했다.

// 하란을 떠났을 때 야곱의 장자 르우벤의 나이를 열살 조금 넘었다고 가정한다면 야곱이 세겜 성 앞 들에서 거주한지 적어도 오년, 막내도 들에 나가 목축하는 나이가 되었고 디나도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갈 나이가 되었다면 10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을 것이다.

할례. 난지 팔일만에 하는 할례. 과연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받았을까? (창세기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팔일만에 할례를 행했다고 기록하지만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고는 할례를 행했다고 기록하지는 않는다. 또 하란에서 얻은 야곱의 종들은 무할례자였을 것이다.) 야곱은 과연 자신이 받은 할례를 기억하고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까? 그렇다면 야곱은 하란 생활 20년동안 첫 칠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한해에 한번씩은 태어난 아들들에게 할례를 베풀었을 것이다. 곧 하나님의 언약을 어쩔 수 없이 기억했다는 뜻이된다. 야곱의 가족에게 할례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 후손에게 주시며, 하나님이 아브라함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언약의 증표였기 때문이다. 할례는 자연스럽게 야곱이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하는(가르치는) 기회였을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의 의미보다 할례의 고통을 알았다면 적어도 야곱의 집안에서는 새로 얻은(산) 남자 종들에게 여전히 할례를 시행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야곱의 아들들은 그 고통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야곱은 이 사건에 대해 아직까진 침묵한다. 야곱의 아들들이 전면에 나선다.

이야기가 중간에 중단되어…. 내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