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데려오는 24장 사건에서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공 같은 조연이다.) 라반과 브두엘은 아브라함의 종에게 이 일이 주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니 자신들이 반대할 수 없다고 대답하면서 리브라를 주하나님의 명령대로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고 말한다. 라반과 브두엘이(리브가의 아버지요 마땅히 혼주의 위치여야 하는데 50절에 이름이 딱 한번 나온다. 대신 오빠 라반이 혼주를 자처한다.) 어떻게 이일이 주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아브라함의 종의 말과 행동이 답이다. 아브라함의 종은 주하나님을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52절에 와서 아브라함의 종은 엎드려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수식어가 없는) 주하나님께 절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종의 하나님도 되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다음날로 리브가를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한다. 라반과 리브가의 어머니는 며칠이라도 리브가와 함께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만류하나 아브라함의 종은 주하나님께서 주신 형통한 길에서 지체할 수 없다고 저들의 만류를 듣지 않았다. 결국 리브가에게 결정권이 돌아갔고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 함께 가겠다고 결정한다. 리브가 가족들은 리브가에게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할지라”라고 축복한다. 지난 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 가족들에게 주하나님이 맺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면 라반과 리브가의 어머니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축복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리브가의 동의도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은 아브라함을 따라 할례를 받았을 것이고 자신도 아브라함의 언약에 포함된 백성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 가나안 땅에 돌아왔다. 이삭은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을 하다가 리브가를 데리고 오는 아브라함의 종의 무리를 보았다. 리브가는 멀리 있는 이삭을 보고 낙타에서 내려 아브라함의 종에게 이삭이 누구인지 묻는다. 종은 이삭을 주인이라고 대답한다. 종은 자신이 행한 일을 이삭에게 다 보고했고, 이삭은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여 사랑하였다. 이삭은 리브가와의 결혼으로 어머니 사라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다고 한다.
// 아브라함의 종, 저 멀리 있는 남자가 누구냐라는 리브가의 질문에 ‘내 주인’이라고 대답한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 오는 모든 여정에 대해 주인 이삭에게 보고한다. 아브라함의 종에서 세례자 요한의 품격을 본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3:30 새번역) 아브라함의 종이 사명을 완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낙타 열마리에 싣고간 폐물이 아니라 앞서 행하시는 주하나님을 의지 했기 때문이다. 한걸음 한걸음 자신의 주인인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절하며 (묻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소임을 다했다. 라반과 리브가 모친이 리브가에게 한 축복을 읽으면 아브라함의 종은 저들에게 주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보다 앞서 라반과 브두엘이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주는 것도 주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도 아브라함의 종의 말과 행동에 주하나님이 배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리브가를 데리러 출발 할 때, 아브라함의 종에게 주하나님은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지만, 돌아올 때는 주하나님을 아브라함의 종 자신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그렇다고 자신이 아브라함의 종이요, 아브라함의 상속자 이삭의 종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창세기 저자는 무려 67절에 걸친 24장의 이야기의 주인공 같은 조연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흥하여야 할 자가 이삭이요 자신(아브라함의 종)은 쇠하여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