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5:1-18 

아브라함이 그두라 라는 후처를 맞았다. (사라 생전인지 사훈지 분명하지는 않다.) 아브라함은 그두라에게서 여섯아들을 더 낳았다. 이스마엘, 이삭을 포함해서 여덟을 낳았다. 그러나 상속자는 이삭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다.”(5) 물론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식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동방쪽으로 가게 하였다. 아브라함은 백칠십오세에 죽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을 사라를 장사한 막벨라 굴에 장사 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했다.

창세기 저자는 이어서 이스마엘의 족보를 적는다. 이스마엘의 아들들은 열두 지도자가 된다.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이스마엘도 백삼십칠세에 죽었다. 이스마엘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스마엘이 죽은 후 이스마엘 자손들은 서로서로 대항하며 (맞는편에) 거주했다고 한다.

// 브엘라해로이. 사라가 여종 하갈이 쫓아냈을 때 하갈이 자신을 살펴주시는 하나님을 만난 곳이다. 이삭이 이곳에 거주했다는 것은 이삭과 이스마엘이 사라가 죽은 후  평화롭게 지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아브라함을 장사했다는 것도 사라가 죽은 후,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는 불화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자기들끼리도 서로 적대시하며 거주했다고 한다. 한 핏줄임에도 평화하기는 쉽지 않다. 평화는 핏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만 해도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높고 늙어 기운이 다해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이스마엘도 기운이 다해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다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한다. 다만 아브라함에게는 나이가 늙고 앞에 ‘높고’라는, 곧 ‘좋았더라’ 라는 단어를 덧붙여,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살았다는,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예우를 갖춘다. 그러나 열조나 백성이나 같은 단어를 번역한 것이니, 결국 아브라함이나 이스마엘이나 흙으로 돌아갔다. 죽었다는 의미다.  왜 다른 단어로 번역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을 차별?하는 지 모르겠다. ‘열조/백성에게 돌아갔다’에 죽었다는 의미말고 다른 뜻이 또 있는 것일까? 하여간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 그후에는 심판이 있다. 영생과 영벌이 있다. 차별은 오직 심판자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