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다.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의 족보가 없다. 데라의 족보에서 이스마엘의 족보와 이삭의 족보로 이어진다.)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다. 창세기저자는 리브가를 그냥 친척이라고 하지 않고 밧단 아람의 아람족속중 브두엘의 딸이요 라반의 누이라고 소개한다. 리브가는 이십년 가까이 임신을 하지 못했다. 예순을 바라보는 이삭은 리브가를 위해 주하나님께 간구했고 주하나님께서 이삭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그렇게 해서 에서와 야곱 쌍둥이가 태에 들어섰다. 에서와 야곱은 태 속에서부터 싸웠다. 리브가는 이 문제를 (이삭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주하나님께 물었다. 주하나님께서는 쌍둥이가 두 민족을 이루겠고 큰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라는 예수님의 표현이 여기서 유래했을 수도 있겠다.) 먼저 나온 자가 에서요 후에 나온 아우가 야곱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택하지는 (편애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장막에 머물며 자신을 돕는 야곱을 사랑했다. 이삭과 리브가가 각각 에서와 야곱을 편애(택)한 것이다.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들이 서로 대적했던 것 같이, 둘 밖에 안되는 이삭의 아들들도 화평하지 못했다.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라 팔고사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이삭과 리브가의 편애의 결과가 아닐까? 어느날 정말로 야곱은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했고 에서는 장자의 명분의 중요성을 모르고 떡과 팥죽을 사는데 써버리고 말았다. 창세기 저자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한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언약을 가볍게 여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오빠 라반과 어머니의 축복을 받고 가나안에 온 리브가는 이십년 가까이 태가 열리지 않자 어땠을까? 이삭의 간구로 아기가 뱃속에 들어앉자 리브가는 태는 사람의 축복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신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리브가는 드디어 직접 하나님을 찾는다. 뱃속에 쌍둥이가 서로 싸우자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이와 반대로 묵상도 하고 하나님께 간구할 줄 알았던 이삭은 리브가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지 않은 것 같다. 이삭은 아비 아브라함과 같이 첩을 통해 후손을 잇고자 하지 않았다. 오직 리브가뿐이었다. 그러나 둘이 한 몸은 되었을지 몰라도 한 마음이 되지 못했다. 그결과가 에서와 야곱의 장자명분 매매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새번역)” 임마누엘은 개인적이지가 않다. 공동체적이다. 부부사이에서도 가족사이에서도 임마누엘은 서로 같은 마음을 품어야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