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언약을 기억하고 형 에서에게서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렇다고 야곱이 인간적인 준비를 하는데 게으르지는 않았다. 형 에서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두 떼가 아니라 여러 떼로 나눴다. 앞선 떼에게 야곱이 뒤에 있다고 말하라고 하면서 먼저 보냈다. 야곱은 여러 떼의 선물로 형 에서의 감정을 풀고자 했다. 예물을 실은 떼를 먼저 보내고 마지막으로 밤에 야곱은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과 남은 소유를 인도해서 얍복나루를 건네 보내고 혼자 남았다.
혼자 남은 야곱은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 그 사람은 결국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을 다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 사람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
그 사람은 야곱에게 이름을 물었다. 야곱이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야곱이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야곱이 그 사람의 이름을 묻는다. 그 사람은 이름을 알려주는 대신 야곱에게 축복한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 브니엘은 하나님 얼굴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니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고백한다. 해가 돋았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에 있는 힘줄을 다쳐 절어야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치셨다고 해서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않는다.
//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의 뜻은 무엇인가? 성경 본문은 마치 야곱이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에 주어진 이름이라고 읽혀진다. 이스라엘의 엘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스라는 이기다, 다스리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목적어로 취해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 라고 이해할 수는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져주시듯이 ‘그래 네가 이겼다 네 맘대로 해라’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야곱이 지금까지는 하나님과 및 사람들에게 지지 않고 살아왔지만 (하나님께는 불순종하며)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라는 의미로 주어진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백성이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라고 이해하면 가장 좋을 것 같다. 성도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다.
또 하나님은 야곱과의 씨름에서 싸움은 이기고 승부에서는 졌느냐 하는 의문도 든다. 씨름을 하는데 허벅지 관절을 쳤다면 반칙패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과 야곱의 씨름은 운동 씨름이 아니다. 하나님은 라반과 헤어져서 오는 야곱에게 이미 마하나임을 보여주셨는데, 야곱은 에서의 400명에 눈이 멀어 그만 마하나임에 대해 장님이 되어버린 것이다. 야곱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할 마하나임을 다시 간구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야곱과 함께 하신다고 답하셨을 것이다. 다만 근심 걱정에 야곱은 마하나임을 못보고 있을뿐이다. 두려움에 마하나임을 못보는 야곱에게 다시 마하나임이 야곱을 둘러 싸고 있음을 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축복이라고 생각된다. 마침내 야곱은 자신과 씨름한 그 사람이 마하나임의 대장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야곱의 씨름, 간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결국 내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순종의 고백이다.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한다. 인생길에서 차라리 다리를 저는 것이 하나님과 싸워 이기는 (불순종하는) 것보다 낫다.
사족: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기전에 에서에게 먼저 예물을 보내는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라는 말씀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