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1:1-16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를 닮아 촉이 좋은 모양이다.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치면서 치부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라반도 자기의 술수가 먹히지 않자 야곱을 보는 안색이 바뀌었다.

때가 된 모양이다. 주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신다. 주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야곱과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

야곱은 도청할 수 없는 들에 레아와 라헬을 불러 하나님께서 벧엘의 서원대로 이곳을 떠나 야곱의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라헬과 레아도 아버지 라반에게 상속받을 것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취하게 하신 재물이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기 때문에 야곱에게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말씀에 순종하라고 대답했다. 라헬과 레아도 야곱의 순종에 동참하겠다는 뜻이다.

// 오늘 되씹게 되는 말씀은 9절이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여기서 빼앗았다는 것은 훔쳤다는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니라 취해서 옮겼다라는 뜻이 강하다. 심지어 구원하다(건져내다)는 뜻으로 많이 쓰였다. 하여간 하나님의 성품에 훔쳤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어색하지만 포인트는 한사람의 치부는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의 복을 간구하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어도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아 달라는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라반의 가축을 빼앗아 야곱에게 주셨어도, 라반이 가난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야곱이 자기 집을 세울 정도로 부자가 되자 라반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오늘날 가진 자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다.

하나님께서 라반의 재물을 야곱과 공평하게 나누셨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성도들도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내가 좀 더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좀 더 나누라고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강제로라도 내것을 나누게 하실 때 라반의 입장만 되어 안색을 바꿀 이유가 없다. 야곱이 되어 나의 모든 재물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에 감사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눠야 한다. 앞에서 사용한 공평은 ‘똑같이’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다.

// 공동체의 화목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나에게 주신 말씀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말씀을 야곱처럼 가족들에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잘 설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수 있도록 … 하나님 아는 것 대신 다른 것들로 갈라진 한국교회에 꼭 필요하다.

창세기 30:25-43

라헬이 요셉을 낳았다. 첫 칠년 후 야곱이 레아 사이에서 르우벤을 낳고 연년생으로 유다까지 낳았다면 4년, 라헬의 종 빌하가 연년생으로 둘을 낳았다면  적어도 2년,  레아의 종 실바가 둘을 낳는 동안  또2년 그리고 레아가 아들 둘과 디나를 낳기 위해서도 적어도 3년의 세월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라헬이 요셉을 낳았으니 또 적어도 1년정도의 세월이 지났다. 충첩되는 기간이 있어도 두번째 칠년이 지난지 꽤 되었을 것이다.

야곱은 자녀가 동서남북으로 많아질 것이라는 언약의 절반을 성취했다. 이제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남았다. 그래서 외삼촌 라반에게  처자를 데리고 나의 땅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라반에게 야곱은 복의 통로였다. 라반은 야곱을 잡았다. 그래서 다시 품삯을 놓고 거래를 했다. 빈털털이로 고향을 도망치듯 나와야 했던 야곱은 이 계약을 자신의 집을 세우는 기회로 삼았다. 그래서 양떼 중 아롱진 것과 점있는 것과 검은 것만 자신이 품삯으로 취하고 나머지는 라반 외삼촌 몫이라고 계약한다. 라반은 옳다구나 하면서 계약을 받아들인다. 라반이 먼저 술수를 쓴다. 아롱지고 점있고 검은 것들을 미리 가려 자기 아들들에게 맡기고 나머지 양들만 야곱에게 맡기고 두 양떼가 섞이지 않도록 사흘길이나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건강한 양들이 얼룩지고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게 하는 비책이 있었다. 야곱은 매우 번창하게되었다. 야곱은 이렇게 많은 노비와 낙타와 나귀를 거느리는 자기 집을 세웠다.

// 야곱이 축산 전문가였나?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치면서부터 라반의 적은 소유는 번성해졌다. 라반은 이런 야곱을 놓치기 싫어 새로운 계약서를 내밀었고, 축산 전문가 야곱은 라반이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내 걸었다. 그러나 야곱이 축산 전문가라서 이런 조건을 내 건 것이 아니라, 아들 열 하나와 딸 하나를 낳으면서 출산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고, 벧엘 언약을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가지가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야곱 자신이 이들 나무가지들을 보면서 벧엘 언약을 기억하는 방편으로 이용했을 것이다. (벧엘의 원래 이름 루스와 살구나무 히브리어 단어 루즈는 같은 단어로 보인다.)

개인적인 야곱의 비책은 나무가지들은 야곱의 축산경험에서 나온 노하우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으로 인해 벧엘 언약을 잊어버리고 자꾸 밧단 아람에 눌어 앉게 되는 자신을 경계하고 벧엘 언약을 기억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평안히 가고자 하는 야곱의 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야곱은 이제까지 자신을 지탱해왔던 거짓과 술수를 내려놓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자기 집을 세우고자 했다.

시편 127편의 시인은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라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고 노래한다. 자식이 화살 통에 가득한 용사는 복이 있다고 노래한다. (에서를 만났을 때) 부끄러움을 당치 않도록  하시는 주님. 이렇게 읽으면 완전 야곱의 노래다.

사람들은 자꾸 야곱의 번창에만 관심이 있다. 늙어서도 언약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믿음으로 새로 시작한 야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창세기 30:1-24

라헬은 레아가 쑥쑥 아들을 낳는데 자신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언니 레아를 시기한다. 라헬은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고 바가지를 긁었다. 야곱은 라헬에게 라헬을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라헬은 여종 빌하를 씨받이로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식을 얻어 아들을 낳아 키우겠다고 한다. 야곱은 빌하에게서 아들을 낳았고 라헬은 단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빌하는 둘째를 낳았고 라헬은 납달리라고 불렀다. 이제 곧 레아를 따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출산이 멈춘 레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기의 시녀 실바를 씨받이로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했다. 실바도 야곱에게서 갓과 아셀을 낳았다.

어느날 르우벤이 합환채를 얻어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다. 이것을 본 라헬이 레아에게 야곱과의 동침권을 팔아 합환채를 샀다. 그날 밤 야곱이 레아와 동침하였고 하나님은 레아의 태를 다시 여셨다. 잇사갈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레아가 잇사갈을 낳자 야곱은 또다시 레아를 찾았다. 야곱은 열심히 자손을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언약의 전반부를 기억한 것일까?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스블론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레아는 여섯아들로 만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덤으로 딸 디나까지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라헬을 생각하시고 라헬의 태를 여셨다. 라헬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하나님께서 내 부끄러움을 씼으셨다는 뜻에서 이름을 요셉이라고 불렀다. 라헬은 하나님께 아들을 더 달라고 간구했다.

// 야곱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라헬에게 출산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사람의 꾀를 버리지 못했다. 라헬의 종 빌하에게서 낳은 단과 납달리의 이름은 다툼과 경쟁이라는 뜻이다. 이에 질세라 레아도 자신의 종을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두 아들을 낳는다. 갓과 아셀의 이름은 복과 기쁨과 연관된 단어다. 부모들의 이런 시기 질투 미움 다툼은 자녀들에게도 미친다. 르우벤이 들에서 합한채를 가져다 어머니 레아에게 주었다. 합환채는 성욕을 자극하는 풀일수도 있고 임신이 잘되게 하는 풀일 수도 있다. 라헬이 동침권으로 합환채를 산 것인지 레아가 합환채를 미끼로 동침권을 산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각자의 종을 야곱에게 주는 것도 모자라 민간요법까지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모든 일에 야곱은 침묵한다. 출산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욕을 따르는 모습을 본다. 레아는 합환채를 내준 보상으로 잇사갈을 얻었다고 이름을 지었고 여섯째 스블론을 낳고는 만족한다. 그리고 딸 디나를 낳자 출산경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뒀다고 자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다른 반전을 이끌어 내신다. 라헬이 요셉을 낳은 것이다. 합환채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라헬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합환채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태를 여셨다는 것을 안 라헬은 그제서야 하나님께 아이를 간구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라헬의 계획대로 움직이시지는 않으신다.

계획은 사람이 하는 것 같아도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어느새 야곱의 아들이 열 하나가 되었다. 야곱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화목이 깨어진 가족. 하나님은 함께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출산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성을 낸들, 하나님께서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다고 고백한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 정욕을 따르는 우리들을 그대로 반영한다. 임마누엘을 누리게 하소서.

창세기 29:21-35

야곱에게 칠년은 며칠과 같았다. 기한이 차자 야곱은 라반에게 라헬을 달라고 요구한다. 라반은 마을 사람을 다 모아 혼인잔치를 베풀고 그날 밤 라헬 대신 레아를 야곱에게 주었다. 잔치에 취했던 야곱이 아침에 보니 자신이 취한 사람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야곱은 라반에게 왜 자기를 속였냐고 물었다. 라반은 마을잔치를 들먹이며 그 지방에서는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주지 않는다고 해명한다. 대신 일주일 있다가 라헬도 아내로 야곱에게 주겠으니 칠년동안 더 일해달라고 요구한다. 야곱은 라반에게 동의하고 일주일 후에 라헬로 아내로 맞았다. 혈혈단신으로 밧단 아람에 온 야곱에게  두 아내와 두 아내의 여종 두명이 생겼다.

주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의 태를 여셨고 라헬에게는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레아가 아들 르루벤을 낳았다. 그러나 야곱은 여전히 라헬을 사랑했다. 레아가 둘째 시므온을 낳았지만 마찬가지 였다. 레아는 세째 레위를 낳은 후에는 야곱과 연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야곱의 라헬 사랑은 여전했다. 네째 유다를 낳은 후에, 레아는 더 이상 야곱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 레아의 출산이 멈췄다.

// 외삼촌 라반의 속임수는 야곱보다 한수 위였다. 야곱의 속임수는 어쩌면 브두엘의 집안내력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라헬도 아버지 라반을 속인다.) 야곱은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서원을 라헬을 위해 또다시 칠년동안 묻어두고 만다. 하여간 태생적 장자권을 지킨다는 라반의 꼼수에 야곱은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언약을 잊어버리고 살면 속이고 속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고 교훈한다.

하나님은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레아를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언약을 지켜가신다.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레아를 통해 언약을 이뤄가신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에 취해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하다. 셋도 아니고 넷이면 동서남북이 꽉 차는데도 말이다. 야곱의 사랑을 얻지 못하였지만 네째 유다를 낳은 레아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어쩌면 레아는 야곱이 처음 밧단 아람에 도착해서 라반에게 자기의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을 귀담아 듣고 마음에 담아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네째를 낳은 후에 내가 이제는 주하나님을 찬양한다고 유다라 이름 지었다. 더이상 야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이뤄가시는 주님을 바라본다고나 할까? 야곱의 사랑은 못받아도 다산으로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획은 사람이 세우나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레아의 태를 닫으셨다. 놀랍지 않은가?

야곱처럼 자기 욕심에 취해 서원을 묻어두는 것도, 레아처럼 자녀을 많이 낳아 (자기 방법으로) 언약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보다 하나님 안에 거하라고 하신다. 임마누엘!

창세기 29:1-20

야곱이 밧단 아람에 도착한다. 창세기 저자는 밧단 아람을 동방의 땅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의 종이 도착했던 우물가를 떠올리게 한다. 야곱은 우물가의 사람들에게 내형제여 라고 부르면서 라반을 아느냐고 묻는다. 그들이 라반을 안다고 하자 라반이 평안한지 묻는다. 그들은 라반이 평안하다고 답하면서 지금 양을 몰고 오는 사람이 라반의 딸 라헬이라고 알려준다. 야곱은 그들에게 양에게 물먹이는 문제에 대해 마치 양치기 전문가처럼 얘기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라헬이 라반의 양떼를 몰고 우물가에 도착하자 야곱은 라반의 양떼에 먼저 물을 먹여주고  라헬에게 입맞추고 (인사하고) 소리내어 울며 자기가 라반의 조카요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라헬은 얼른 달려가서 라반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라반이 달려와서 야곱을 영접하고 집으로 인도했고 야곱은 자기 사정을 낱낱이 라반에게 말했다.  라반은 야곱을 내 혈육이로다 하면서 반겨주었다. 야곱은 일을 잘 했던 것 같다. 한달정도 지나자 라반은 야곱에게 품삯을 주겠다고 했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므로 칠년동안 일할테니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답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하여 칠년동안 라반을 섬겼다. 창세기 저자는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고 적는다.

// 아브라함의 종은 우물가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도망자 야곱은 라헬을 의지해야만 했다. 라헬에게 물을 얻어 마신 것이 아니라 라헬이 몰고온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인다. 라헬에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이미 우물가의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해도) 자신이 라반의 조카요 리브가의 아들임을 밝힌다. 아브라함의 종은 선물을 주는 자였는데 야곱은 얻어먹는 자가 되었다. 마흔이 넘은 야곱의 도망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리브가가 말했던 몇날이 칠년으로 훌쩍 늘어났다. 하나님께 평안히 내 아버지 집으로 가게해 달라는 야곱의 서원도 칠년의 세월에 묻히고 만다. 동방 땅은 남자들의 무덤인가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땅으로 데려가서는 안된다고 종에게 당부했고, 벧엘의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를 (야곱을 가나안 땅으로) 데려 올것이라고 하셨나 보다. 하여간 야곱은 양치는데도 목동 뺨을 쳤던 것 같다. 에서가 며칠씩 집을 비우며 사냥을 다녔다면 야곱은 장막에 머물면서 양이나 염소를 쳤을 것이다. 리브가가 별미를 만들기 위해 야곱에게 새끼 염소 두마리를 가져오라는 것이 그 증거다. 라반은 야곱의 이런 재주를 사고 싶었고 야곱은 첫눈에 반한 라헬을 차지하고 싶었다. 혈육이라고 반겼으면서도 한달만에 계약관계로 바뀌고 말았다. 야곱은 라헬의 곱고 아리따움에 아버지의 집을 잊고 만다.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하나님께 한 서원을 잊어버리고 만다. 야곱의 도망길은 이렇게 진행된다.

장자의 명분을 샀던 야곱은 이제 라헬을 사기 위해 칠년을 투자하기로 한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문제는 목표에 대한 집착은 정작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잊게 한다는 것이다. “주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는데 내가 알지 못하였다” 라는 벧엘에서의 고백이 반복되는 것이다.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임마누엘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