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35-44

35-37 //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더이상 예수를 책잡기 위해서 묻는 자가 없었다.) 예수께서 선수를 잡으시고 듣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물론 답을 듣고자 질문하신 것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심을 (곧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가르치신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성부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께 말씀하신 것을 시편에서 노래했다고 증거를 대신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으니 어찌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즐겁게 들었다고 마가는 기록한다.

38-40 // 예수의 가르침이 이어진다.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직집적으로 말씀하신다. 서기관들, 곧 긴옷을 입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고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저들의 외식을 지적하신다. 서기관들은 뒤로는 과부의 재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고 꼬집으신다. 외식하는 서기관들이 더 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41-44 예수께서는 헌금함을 향해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하는지 보셨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고 한 과부는 두렙돈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가르치신다. 여러 부자들은 모두 다 그 풍족한 중에서 (일부를) 넣었지만,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하신다. // 이 과부는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보화가 묻힌 땅을 산 사람이요,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값비싼 진주를 산 사람이다. 하나님나라는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야 살 수 있다. 그래서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 공평하다.

>> 서기관들은 말씀을 맡은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무를 보아도 숲을 보지 못했다. 구약성경을 읽어도 행간을 읽지 못했다. 그결과 오실 메시야에 대해 바로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그런 서기관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정정해 주신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를 일관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 말씀을 맡은 자들의 외식.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법망을 피해 온갖 부조리를 저지르듯, 말씀을 잘 아는 서기관들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해 가난한 과부들의 재산을 삼킨다고 지적하신다. 좋은 옷을 입고 종교적으로  보이고 높은자리 윗자리에 앉지만 외식이라고 하신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독자들은 계속 즐겁게 들었을 것이다. (물론 서기관들은 뜨끔했겠지만) 마가는 1장에서 이미 뭇 사람이 예수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에  놀랐다고 기록했었다.

>> 자기의 소유를 다 = 자기의 모든 소유. 마태복음 천국비유에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보화가 묻힌 밭을 사고 값비싼 진주를 산 것과 과부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헌금한 것은 같은 행동이다. 하나님나라의 가치다.  이렇게 이 과부는 하나님나라를 샀다. 부자들 같이 풍족한 중에 일부를 넣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나라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일부를 희생하고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주일 하루의 열심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날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신다. …

마가복음 12:18-34

18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 포도원 주인과 악한 소작농의 비유는 아들의 죽음과 주인의 심판으로 끝난다. 이 비유는 부활이 없다면, 아들을 사지로 보내는 (소작농들이 아들은 존경하리라 라고 주인이 생각했다고 해도) 아버지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사두개인들도 예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권위 논쟁을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19-27사두개인들은 예수께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죽자 둘째가 형수를 아내로 취하고 둘째가 죽자 세째가 형수를 취해서 순서대로 일곱째까지 형수를 아내로 취한 후 모두 죽으면 부활 때에 이 여자는 일곱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 오해한다고 답하시면서, 부활의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답하셨다.  예수께서는 모세의 책중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라고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느냐고 반문하신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며 부활에 대해 크게 오해했다고 다시 한번 말씀하신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고, 이삭의 하나님이셨고, 야곱의 하나님셨다 라고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언급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교제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아직 몸의 부활을 하지 않았지만 살아있음을 뜻한다. 곧 내세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누가는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영생이든 영벌이든) 살았다고 부연설명한다.  예수께서는 이렇듯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오해했다고 선언하신다. 오해했다는 것은 말씀에서 벗어나 우로나 좌로 치우쳤다는 뜻이다. 뿌리를 깊이 박지 않고 무성한 잎사귀만 자랑하면, 즉 사람들이 율법을 잘 지키려고 만든 전통과 관습에만 집착하면 우로나 좌로 치우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알 수 없다.

28-34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아마도 바리새파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 알고 (사두개파를 입다물게 하셨으니…) 예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인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첫째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첫째되는 계명, 곧 가장 큰 계명이라고 대답하셨다. 이 서기관은 예수께 동의 했다. 이 서기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람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 곧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적용한다. 예수께서는 이 서기관이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그에게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하셨다.  마가는 이후에 더이상 예수께 감히 묻는 자가 없다고 기록한다.

>> 하나님나라에서 멀지 않다. 거의 다 왔다고 속으면 안된다. 멀지 않다는 것은 아직 들어가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심지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마23:23) 라고 강하게 책망하셨다고 기록한다. 아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과 듣고 행하는 것은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차이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고의 차이다. 멀지 않다고 만족해서는 안된다. 끝까지 안전운전을 해야 한다.

>> 한 서기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람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 곧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적용한다. 예배적 삶이 성도들의 생명과 다름 없으나, 주일예배가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주일예배가 제사로 전락해 버렸다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사랑이 곧 이웃사랑이요, 이웃사랑이 곧 예배적 삶 (하나님사랑) 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께서 저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실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서기관도 번제물과 기타 제물을 드리는 제사 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낫다는 것을 알았는데 부활의 삶을 사는, 곧 하나님 앞에서 이미 영생을 살고 있는 성도들이라면 어찌 살아야 할 지 분명하다.

마가복음 12:1-17

예수께서는 권위에 대한 즉답을 피하셨다. 그리고 다음의 비유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다.

1-12 한 사람이 울타리도 있고 포도주 틀도 있고 망대도 있는 포도원을 세우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갔다. 때가 이르러 포도원을 세 주고 타국으로 간 한 사람이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냈다. 세입자 농부들은 세를 받으러 온 종을 심히 때린후 세를 주지 않고 돌려 보냈다. 포도원 주인은 다른 종을 보냈지만 세입자 농부들은 그 종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다. 포도원 주인이 다른 종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더러는 때렸고 더러는 죽였다. 포도원 주인은 최후로 자기 아들을 보내기로 한다. 아들은 존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입자 농부들은 상속자인 아들이 죽으면 그 유산이 자신들 것이 된다고 생각하며 아들도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 던졌다. 결국 포도원 주인이 직접 와서 세입자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준다고 비유를 마치신다. 예수께서 시편의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라는 말씀을 비유에 첨부하신다. 대세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잡으려고 해도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자리를 떠났다.

// 이 비유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에 대한 답변이라고 봐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권위를 언급하며, 자신의 권위도 하늘로부터 임을 간접적으로 밝히셨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권위를 받은 세례 요한과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을 정도로  굳이 따로 해석할 필요조차 없었다. 물론 저들이 온전히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다.

>> 건축주와 건축가. 하나님나라를 집이라고 생각하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뿌리가 뽑힌 것도 모르고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으로 메시야를 기다려 왔을 것이다. 자신들은 이땅에서 건축가로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통이 돌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해마다 세우면 무너지고 세우면 무너지는 제사밖에 드릴 수 없었다. 그런데 건축주되시는 하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버린 예수를 모퉁이 돌, 곧 성전의 주춧돌로 삼으신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된 이유다. 건축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다.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이 ‘주’되신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13-17 (권위 논쟁으로 예수를 책잡으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실패했다.) 두번째로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손을 잡아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했다. 이들은 먼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추켜 세웠다. 그리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는지 예수께 물었다. 예수게서는 데나리온를 가져오라 하시고 데나리온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  예수님 당시 로마돈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형상과 가이사의 이름과 가이사를 신으로 칭송하는 문구가 새겨진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이다. 더 좁히면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십계명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

>>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민이라면 하나님께 소출의 일부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의무다. 자연스럽게 포도원 주인과 악한 소작농 비유와 연결된다. 소출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곧 언약(계약)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도원을 맡은 악한 소작 농부들은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인이 어떤 분인지 몰랐다.  (예수께서는 영생을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만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내지 못했으니 하물며 헤롯당이랴. 특별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지음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옷자락에 적어가지고 다니는 자신들이 뿌리채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 같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가르침에 놀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달러와 리엘. 캄보디아는 캄보디아 돈 리엘과 함께 미국 달러를 공용화폐로 사용한다. 1달러는 약 4000 리엘의 가치가 있다. 동네 시장에서는 보통 리엘을 사용하고 마트에서는 달러를 사용한다. 미국 달러에는  IN GOD WE TRUST 라고 적혀있다. 리엘에는 뭐라고 적혀있는지 모른다. 겨우 숫자만 읽는다. 예수께서 굳이 유대 돈 드라크마나 세겔을 가져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로마 돈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하신 이유가 있었다. 어떤 선교사는 미쿡이 잘 사는 이유를 달러를 꺼내  미쿡 사람들이 IN GOD WE TRUST 하기 때문이라고 현지인들에게 설명하기도 한다. 완전히 틀린 말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넌센스다. 돈에 뭐라고 쓰여져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 마음에 무엇이 적혀 있느냐가 중요하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썼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성경구절이 적혀있는 수련회 티셔츠을 받아 입기만 하면 뭐하랴?

>>>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게 하소서.

마가복음  11:20-33

20-25 (다음날 아침)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는 길 어제 무화과 나무가 뿌리채 말라있었다. 그것을 보고 베드로가 예수께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다고 말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산을 옮길 믿음이 있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된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을 줄로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신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 허물을 사하여 주신다고 하신다.

// 하룻만에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는 뿌리채 말랐다. 사실 무성한 잎사귀로 포장되었던 실체가 드러난 것뿐이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채 말랐다는 베드로의 보고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라’ 라는 동문서답을 하신다. 어제에 이어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 저들에게 뿌리, 곧 살아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깊이 박으라고 가르치신다.

>>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깊이 박는 것은 예배적 삶이요 기도의 삶이라고 가르쳐주신다. (마가복음서에선 예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드디어 기도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신다.) 첫번째 의미는 예배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삶이다. 두번째는 예배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간구하는 삶이다.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예배적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적용으로 많고 많은 것 중에 형제를 용서하라고 하신다. (사실 인생에 참된 용서보다 더 어려운 적용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마태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후에도 바로 용서에 대한 적용을 하신다. 주기도문의 (기도의) 핵심 중의 핵심은 용서다. 예배적 삶의 핵심 중의 핵심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것이다.

>>> 산을 옮기기 위해서는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대로 한다면 겨자씨만한 믿음이면 된다. 다시말해 믿음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유무다.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산을 바다에 던질 수도 있도 산을 욺직일 수 있다. 믿음과 기도는 (예배적 삶은) 한 쌍이다.

27-33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으로 가셨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작정을 하고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 라고 따져 물었다. 예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고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라고 반문하셨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답을 못했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않겠다고 답하셨다.

// 예수께서는 뿌리채 말라버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마주하신다. 뿌리까지 말라버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권위/권세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권세, 누구의 권위로 성전을 휘젓고 다니냐고 물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권세/권위라고 즉답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뿌리까지 말라버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믿음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대신 세례요한의 권세/권위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라고 반문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세/권위가 하늘로부터임을 간접적으로 답하신 것이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박지 않은 믿음은 뿌리채 마른 잎사귀만 무성했던 무화과 나무 처럼 영원히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랬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박고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으로 세우심을 입어서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믿음을 굳게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외모로 자랑하지 말라고 하신다. 권위로 자랑하지 말라고 하신다. 직분이 곧 권위는 아니다. …

마가복음 11:1-19

1-7a 예루살렘이 가까운 벳바게와 베다니까지 왔다. 예수께서는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사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끌고오라고 명하셨다. 만일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라고 답하면 즉시 보내 줄 것이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왔다.

7-11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끌고와서 자기 겉옷을 그 위에 얹자 예수께서 타셨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서서 뒷서서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를 외쳤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성전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둘러보셨다. 때가 이미 저물어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로 가셨다.

12-14 예루살렘 입성 둘째날, 베다니에 숙소를 마련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오시는 길에 시장함을 느끼셨다. 예수께서는 멀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셨으나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 잎만 무성했지 열매는 없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는 나무에게 영원토록 사람이 그 나무에서 열매을 따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15-17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예수께서 다시 성전에 들어가셨다. 성전 안에서 매내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과 제물을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성전 안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가르치셨다.

18-19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성전에서 행하신 일을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꾀했다. 무리가 예수의 교훈을 놀랍게 여겼기 때문에 함부로 처리할 수 없었다. 날이 저물자 예수께서는 다시 성밖으로 나오셨다.

//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구약의 예언대로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시고 뒤뚱뒤뚱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는 예수. 이런 예수를 정말 무리들은 왕으로 환영했을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자 바로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 보셨다. 그러나 저물어 사람의 흔적이 없는 성전을 나오셔서 예루살렘 성 밖에 베다니로 가셔서 여장을 푸셨다.

// 베다니에서 일박하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예수께서 시장함을 느끼셨다. 정말 배고프셨을까? 무화과 떄가 아님을 모르셨을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을 보지 못하심을 비유로 한탄하시는 것은 아닐까? 종교적 겉치례만 남아 있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으로부터는 결코 (영원히)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간접적으로 들려주시는 것이다.

>> 예수님은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신다.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이사야의 말씀을 적용하신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분별력 없이 모두들 저 좋을 대로만 하고 저마다 제 배만 채운다고 이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말씀을 성전을 담당하는 지도자들에게 그대로 적용하신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잎사귀만 무성한 대제사상들과 서기관들로부터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얻을 수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그러니 어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지 않을까?

>>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을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기도는 간구의 의미보다는 예배의 의미가 더 강한 단어같다. 곧 성전은 만민이 모여 예배하는 집이다. 예배의 근간은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이다. 개인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이다. 주님은 성도들을 개인적으로 부르시지만 교회 공동체의 지체로 부르신다.

>> 둘째날도 저물매 예수께서는 성밖으로 나가셨다. 예루살렘 성은 이미 저물었다. 당연히 성전도 저물었다.  첫째 날도 둘째 날도 예수께서는 하루의 시작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셔서 시작하신다. 참 성전은 예루살렘 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계신 곳임을 암시하기 위해 마가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기록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