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1-19

1-6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보셨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치시는지 주목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일어서게 하시고 회중을 향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것이 옳은지 물으셨다. 당연한 질문에도 회중은 잠잠했다. 예수님은 잠잠한  회중의 마음이 완악함을 아시고 탄식하셨다. 그리고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셨고 그의 손은 회복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일 의논을 했다.

// 전통과 관습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답을 알고도 잠잠했다. 진리로 전통과 관습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관습으로 진리를 평가했던 것이다. 주객전도일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은 완악했다. 무너뜨려야 할 이론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이것들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한쪽 손 마른 사람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이날까지 살아왔을 것이다. 혹시나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바리새인들은 드디어 완악한 본성을 드러낸다. 심지어 평소같았으면 상종하지 않았을 헤롯당과도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일 의논을 했다.

7-12 예수님은 마을에서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가셨다. 큰 무리가 따랐다. 심지어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강건너편과 두로와 시돈 근처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이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왔다. 예수님은 자신을 만지려는 무리를 피해 작은 배에 올라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짖자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 예수님의 소문은 갈릴리에서 저 멀리 유대 남쪽 이두매까지 퍼졌다. 또 두로와 시돈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사람들도 이미 하나님나라 복음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무리들은 주도권을 예수님께 온전히 드리지 않았다.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만져도 같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에게서 한걸음 물러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든 귀신들로부터든 큰 자로 인정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왜? 귀신들의 찬양은 찬양이 아니다. 예수님은 돌들보다 못한 귀신들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하셨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부터 하나님으로 인정 받기를 원하신 듯하다. 한편으로는 드러나셔야 (영광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시는 자세라고 생각된다.

13-19 예수님은 산에 오르사 무리들 중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따로 부르셨다. 열둘을 세워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도 하게 하시며  축귀의 권능도 가지게 하셨다. 마가는 열둘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예수를 판 가룟 유다도 마지막에 포함시킨다.

//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열둘을 세우셨다. 열둘을 세우신 첫번째 이유가 함께 하심이다. 두번째는 제자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는 기록에서 ‘사도’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도로 세우셨다. 시므온에게 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는데 단순한 별명이라기 보다는 제자들 사이에서 이들이 해야할 역할을 부여하신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가룟 유다가 회계였다면 베드로는서기, 야고보와 요한은 총무와 홍보팀장 쯤 되지 않았을까? 별생각을 다한다. 그렇다고 누가 크고 누가 작고 하는 그런 수직적은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름만 오른 8명도 귀하기는 마찬가지다.

>> 바리새인들은 전통과 관습에 얽매인 우파여서,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유다는 좌파여서 결국 예수님을 버렸을까? 우파든 좌파든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진 것들, 모든 이론들이 하나님나라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을 돌이키게 한다. 전도자는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피한다고 가르쳤다.

>>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고백한다. 바울의 고백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버리신 분이셨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버린자로 기록된다. 팔았다라고 번역되지만 제 값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버린’이 더 맞는 번역인것 같다. 가룟 유다는 자기 소유 전부를 팔아 사야할 보화가 뭍힌 밭의 보화요, 값비싼 진주이신 예수를 버렸다.

>>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알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나를 보내신 사도적 사명이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온전한 임마누엘을 누리고 사명자로 살도록 오늘도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자신을 버리라고 하신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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