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4 예수님은 배를 타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겼다. 큰 무리가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예수 발 아래 엎드려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오셔서 안수해서 구원을 받아 살게 해 달라고 간곡히 구했다. 예수님은 야이로와 함께 가셨고 큰 무리라 예수님을 에워싸 밀치며 따라갔다.
25-34 열두해를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자가 예수를 에워싸며 따라가는 무리 중에 있었다. (자기 소유 전부를 팔아)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지만 아무 효험이 없었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의 옷에 손을 대면 구원을 받을까 생각하고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 그즉시 그 여자는 병이 나았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도 그 능력이 자시에게서 나간 줄 아시고 무리를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무리가 서로 밀쳐서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예수님은 이 일을 행한 여자를 바라보셨다. 여자는 이실직고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다.
35-43 아직 야이로 집을 향해 가고 있는데 회당장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으니 예수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만 데리고 회당장 집으로 가셨다. 회당장 집은 울음바다였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자 그들은 비웃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보내시고 부모와 세제자만 데리고 아이가 누워있는 곳에 들어가서 달리다굼 하셨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고 놀랐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많이 경계하신후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셨다.
// 열두살 소녀와 열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이 구원을 받았다. 마가는 예수님의 두 치유 사건을 기록하면서 굳이 ‘고치다(치유)’ 라는 단어 대신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아니 예수님이 고침을 구원이라고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회당장 야이로과 열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이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혈루증을 앓은 여인에게는 맞장구쳐 주신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혈루증을 앓은 여자는 치유가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고,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딸의 치유가 두려워할 것이 아닌 믿음의 문제라고 말씀하셨다.
// 두 딸. 회당장의 어린 딸과 예수님의 딸. 회당장의 어린 딸은 갑자기 아팠다기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프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태어나면서 병약하게 태어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되었을 것이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12년 동안 많은 의사를 찾아 다녔듯이 야이로도딸의 치료를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 다녔을 것이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야이로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넉넉했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가난한 과부?가 되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딸아”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리고 그 여인이 밝은 얼굴로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회당장은 자기의 어린 딸을 생각했을 것이다. 야이로는 여인이 자신의 급한 길을 막는다는 생각보다 자기 딸로 낫게 되는 희망이 솟았을 것이다.
// (그러나) 희망은 잠시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말 그대로 복음이다. 오랫동안 혈루증을 앓고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던 여인에게 일어난 일과 같은 소망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잠시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소식으로 깜깜해질 것이다. 예수님은 마치 그 때를 미리 교훈하시는 듯 하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메달린 예수님을 향해 스스로나 구원하라고 비웃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성부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면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었다. 잠잠하라고 하셨다.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 난 것은 굳이 떠들고 다니지 않아도 모두가 알게 될 일이다.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굳이 말씀하실 이유가 없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는 경계의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교훈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좋은 땅 중의 좋은 땅이었다.
>> 그냥 성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보게 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