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24-37

24-30 예수님은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었다. 예수님이 쉴 겨를도 없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했다. 이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다. 예수님은 자녀로 먼저 배불리게 먹게 해야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셨다. 여자는 주님 말씀이 옳지만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여인의 말을 잘 들었다고 하시며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라고 하셨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간 것을 알 수 있었다. //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자 예수님은 이방 사람들에게로 가셨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영광은 이방에서도 가려지지지 않았다. 귀신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마태는 동일한? 사건을 전하면서 예수님께서 이 이방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다고 기록한다.

31-37 예수님은 두로에서 시돈과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다. 군대귀신을 쫓아내시고 배척 당해 직접 가보지 못한 데가볼리에 (열 고을에) 결국 가셨던 것 같다. 갈릴리 호수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은 이어졌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오자 예수님은 이 사람을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에바다’ (열려라) 하시며 귀와 입을 열어주셨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려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데리온 자들과 치유받은 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나 그들은 더욱 널리 전파했다. 이 사건을 듣는 사람들이 심히 놀라며 예수가 모든 것을 잘하였다고 칭찬했다. 못 듣는 사람을 듣게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는 분으로 소문이 났다.

//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끝내 복음을 배척했다면 이방 지역에서는 마침내 복음을 환영했다.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셨지만, 그곳 사람들의 배척에 먼지를 털고 배에 다시 오르신 것이 얼마전인 것 같았는데… 마가는 복음이 이방지역에서는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오히려 환영받고 있다고 강조한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큰 믿음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믿음이 적은 (없는), 곧 예수님의 친절한 설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과도 비교된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을 개에 비유했을 때 그것을 충분히 이해했을 만큼 큰 믿음이 있었다. 이 여인은 마음의 귀가 열린 사람이었다.

// 한 이방 사람의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렸다는 것은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새번역)”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떠오르게 한다. 바울은 ‘마음으로 믿어서’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개역개정)” 라고 해설하고, ‘입으로 고백해서’ 는 “그들의 목소리가 온 땅에 퍼지고 그들의 말이 땅끝까지 퍼졌다” 라는 성경말씀으로 설명한다. 마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스라엘을 만나주고 불순종 하는 백성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정작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된 것은 이방사람들이라고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  사람들이 심히 놀라 예수님이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라고 소문내는 것으로 오늘 본문은 끝난다.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창세기 1장 마지막 절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가 떠오른다.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보시기에 참 좋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모든 것을 심히 좋게 창조하신, 곧 선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 캄보디아도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이 내려졌다. 학교뿐만 아니라 당연히 종교시설에도 적용된다.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드려지는 합당한 예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는 것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요, 이웃사랑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