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32-52

32-34예수께서는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신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놀라면서도 예수를 따르길 두려워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한번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사람의 아들로 온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당시 사법권을 가지고 있던 이방인에게 넘겨,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가 능욕을 받으며 채찍질 당하고 죽을 것이나 삼일만에 살아 나신다고 말씀하신다.

35-40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좌의정 우의정 자리를 달라고 구한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좌의정 우의정 자리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느냐라고 하시면서 예수께서 마시는 잔들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예수께서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신다.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의 잔과 세례에 동참하겠지만 좌우편의 자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준비된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대답하신다.

41-45 열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좌우편의 자리를 구했다는 말을 듣고 화를 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모두 불러다가 하나님나라의 권세는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다름을 가르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로 온 나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다.

46-52벌써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여리고까지 왔다. 디매오의 아들 맹인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예수를 크게 불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바디매오는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셨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 예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고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가라’고 선언하셨으나 바디매오는 보게 되어 그 즉시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다.

>>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르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운 여리고에서 맹인이었던 바디매오가 예수를 따르는 이야기로 마친다. 많은 무리는 예수의 가르침이 권세 있음에  놀라면서도 따르기를 두려워했는데,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가라’고 했는데도 그 즉시로 예수를 따랐다.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셨을 때 겉옷을 (아마도 자신의 소유 전부를) 버려두고 예수께 나아갔었다. 제자들이 배와 그물과 아비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던 장면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바디매오는 눈을 뜨기전에 이미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보게 된 것은 덤이었다.

>>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맹인과 다름 없었다. 하나님나라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재물에 대해 가르치실 때도, 여자와 (이혼과) 어린아이를 언급하시면서도, 아니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면서부터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된다고 강조하셨는데, 그래서 큰 자, 작은 자를 따지지 말고 화목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예루살렘이 가까왔는데도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싸웠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와 다르다고 다시한번 강조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  (성령에 이끌리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했던 바울을,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며 막아섰던 많은 성도들과 장로들과 예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은 몰랐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바로 보았는데,)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삼 세번이나 직접 들은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여전히 몰랐다. 알았다면 누가 크냐는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지체인 성도들도 하나님나라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의 지체라는 것을.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지체가 있는 것이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지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나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해 주시고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신다.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영광을 받고 함께 즐거워하게 하신다. 누구에게 좌의정 우의정 자리가 주어질런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 모두에게 가장 요긴한 자리를 주실 것이다. 오늘도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성실하라고 하신다.

마가복음 10:17-31

17-22 예수께서 길에 나가셨을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정중히 예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알고 있는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 사람은 예수께 자신은 어려서부터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보시면서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셨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그에게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하고 와서 예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다.

23-30예수님은 ‘재물’을 주제로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신다. 이에 제자들도 놀란다.예수께서는 한술 더 뜨신다. 낙타가 바늘 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신다. 제다들이 매우 놀란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예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신다. 베드로는 예수께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말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복음을 위하여 자기 소유의 전부를 버린 자는 이땅에서도 백배의 복을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신다.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하신다. // 하나님나라는 부자가 작은 자가 되고, 작은 자가 큰 자가 되는 나라다. 다시말해 재물의 많고 적음으로 차별당하지 않는 나라다.

>> 영생은 하나님나라다. 하나님나라는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보화가 뭍힌 밭을 사는 것이요 값비싼 진주를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을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고 하신다. 빌 게이트나 노숙자나 심지어 빚쟁이에게 공평하다. 자기 소유 전부를 팔아 사야한다.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 것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내 나라와 하나님나라를 겸하여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했던 부자 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몰랐던 그 부자는 영생을 얻기는 커녕, 세상 근심으로 사망을 이루는 길로 떠났다.

>> 제자들도 영생을, 하나님나라를, 곧 구원을 재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에 놀랐다. 낙타가 좁은 문으로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시니 더 놀랐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입장료가 ‘자기 소유의 전부’라고 하신다. 선하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공정가격이라고 하신다.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다. 있는 자나 없는 자에게 동등하다.

>>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하나님나라를 사는 사람은 이땅에서도 백배의 복을 받는 다고 하신다. 백배의 복이란 소유의 많음이 아니라 자족하는 마음이다. 숫자적으로 백배라기 보다 완전한 자족을 의미할 것이다. 많은 소유에도 불안한 (세상 근심을 하는) 사람들과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임마누엘을 의미하고 곧 영생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과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 성도들이 피하고 싶은 박해는 선택과목이 아니다. 필수과목이다. 복과 박해. 복음과 박해다. 복음과 고난이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다.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박해를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생에서는 박해와 겸하여 복을 받는다고 하시고 내세에서는 영생의 복을 받는다고 하신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마가복음 10:1-16

1 (제자들만 데리고 특별 제자도 수련회를 마치시고) 예수께서는 유대지경으로 들어가셨다.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 지역에서 예수님은 다시 무리들에게 전례대로 (하나님나라 전파와 축귀와 치유를) 가르치셨다. // 예수의 사역은 가르침이다. 축귀와 치유도 결국은 하나님나라를 가르치는 도구이자 열매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님을 알 수 있다.

2-12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시험한다.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모세의 가르침은 어떠냐고 물으셨다. 바리새인들은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이혼하기를 허락했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는 명령을 기록했지만,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때,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한몸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과 제자들만 있을 때) 집에서 제자들이 이혼문제에 대해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라고 하셨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는 것도 간음을 행함이라고 하셨다.  // 바리새인들에 대한 대답에서 예수님은 모세 율법이전인 창조때 주어진 하나님의 법을 답으로 주셨다. 다른 말씀을 덧붙이지 않으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남자나 여자나 이혼의 목적은 간음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냐고 콕 찝어 지적하신다. 하나님은 혼외성애를 허락하지 않으신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라고 허락한 것은 불법적으로 이혼당하는 사회적 약자인 여자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지 이혼을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신다.

13-16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려왔다. 제자들은  No Kids 라고 푯말을 내걸었다. 그래도 예수께 나아오려고 하자 역정까지 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히려 제자들에게 노하셨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만져주시고 축복하셨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영접하는 어린 아이들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어린 아이도 사회적 약자다. 결국 어린 아이는 작은 자다. 낮은 자다. 심하게 말하면 불가촉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은 만져 주셨다. 안수하셨다. 아예 허그하셨다. (안아주셨다.) 버리시지 않으셨다. 율법은 부정한 것을 만진 예수를 부정해졌다고 판단할 것이나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은 거룩하신 예수께서 만진 부정한 어린 아이들이 거룩해졌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나라가 아니라 부정한 것을 깨끗케 하는 나라다.

>> 예수님은 율법적 적용에 저항하신다. 율법을 문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적용하신다.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율법을 주시기 전부터 있던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가르치신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어린 아이같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 낮은 자, 작은 자 들을 주님처럼 영접하는 자,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창조질서를 아는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고 가르치신다.

>> 성도라면 적어도 한번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세례 서약을 한다. 성도가 결혼한다면 또 한번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한다. 이 서약은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순서에 있으니 그냥 하는 것이 아니요 형식적으로 따라 하는 것도 아니다. 세례를 받을 때나 혼인서약을 할 때나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불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일터에서나 지역 사회 공동체에서 불신자라고 차별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는 것은 다르다. 부부생활부터 자녀양육까지 한 몸, 한 마음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몸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 다른 은사로 (역할과 능력으로) 직장이나 사회 공동체에 지체로 참여하는 일과 결혼은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에도 무작정 적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약했다면 배우자를 볼 때마다 서약한 내용을 되씹어야 한다.

>> 믿음이 강한 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을 섬겨야 한다. 먼저된 자, 첫째가, 큰 자가 나중된 자를, 마지막을, 작은 자를 섬겨야 한다. 그럴 때 강한 자들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이 강해진다. 더러워질까봐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더러움을 씻어주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바울은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라면, 아니 모든 성도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마가복음 9:30- 50

30-32 예수께서 갈릴리 가운데를 지나신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다니시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는데 집중하신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내용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었다. 그러나 이런 집중적인 가르침에도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모르는 것을 묻기도 두려워했다.

33-37 가버나움 집에  (아마도 베드로 장모의 집) 계실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는지 물으셨다. 제자들은 꿀먹은 벙어리였다. 왜냐하면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 열두 제자를 불러모으시고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 곧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마침 곁에 있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아 주시며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라고 가르치셨다. // 어린 아이, 곧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영접한다는 것은 모신다는 의미다. 결국 작은 자를 영접한다는 것은 작은 자를 받들어 모신다는 것이다.

38-40 요한이 예수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않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축귀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것이 바른 행동인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고 즉시로 예수를 비방할 자가 없다고 하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하신다.

41-48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 물 한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스스로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신다.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멀쩡한 몸으로 지옥, 곧 영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다. 발이 범죄하면 발을 찍어버리고 눈이 범죄하게 하면 눈을 빼버리라고 하신다.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한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다.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에서 영원히 고통받은 곳이라고 하신다. //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작은 선행을 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만, 예수 믿는 작은 자들을 실족케 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49-50 불에 볶은 구운 소금이 되라고 하신다. 좋은 소금이 되라고 하신다. 소금은 좋은 것이지만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더이상 소금이 아니라고 하신다. 제자들 사이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신다. // 결국 짠 맛이 있는 소금이 가치있는 소금이다. 제자들이 사이에 소금을 두라는 것은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뜻 같다. 제자들이 지켜야 할 정체성을 화목이라고 하신다.

>> 아무리 가르쳐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똑똑한 학생들은 선생님께 질문하면서 배우는데 제자들은 무식이 탄로날까봐 묻지도 못한다. 예수님은 짧고 짧은 비유로, 시청각 효과로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신다. 오늘 가르치심의 특징은 먼저되지 말고 (큰자가 되지 말고) 나중되라는 (작은 자가 되라는) 것이요, 더 나아가 큰 자, 작은 자로 서열을 따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화목한 공동체가 되라고 하신다. 큰 자 ,  작은 자로 다투는 것은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그러니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도 영접하라고, 받들어 모시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길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 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 첫째가 되기 위하여 황새처럼 걷지 말라고 하신다. 뱁새가 되어 저는 자들의 속도에 맞춰 걸으라고 하신다. 두 눈을 부릅뜨고 남의 잘 못이나 지적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한 눈이라도 푯대이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신다. 아무리 좋은 천일염이라도 구운소금이 되어 섬기는 일에 쓰임새가 더 많은 소금이 되라고 하신다. 이렇게 제자들이 서로 큰 자라고 다투지 않고 서로 화목하면, 곧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제자들을 예수의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신다.

>> 짠 맛이 나는 소금이라고 만족하지 말라고 하신다. 불순물을 태워버린 구운 소금이 되라고 하신다. 공동체의 화목을 위해 녹아지라고 하신다.

마가복음9:14-29

14-16 (프롤로그)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 내려 오는 동안 남은 제자들은 큰 무리에 둘러쌓여 서기관들과 변론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내려오시자 무리는예수를 보고 놀라며 예수께 달려와 문안했다. (예수를 보고 왜 놀랐을까? 혹시 얼굴이 아직도 빛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ㅎㅎ)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서기관들과 변론하는지 물으셨다.

17-27 (사건) 무리 중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온 사람이 예수께  자신의 말못하는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왔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능히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온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라 선생님, 곧 예수께 아들을 데려왔으나 예수께서 안계시자 제자들에게 대신 축귀를 간구했었나 보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라고 대답하시며 귀신들린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셨다. 아이를 데려오자 예수는 그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귀신들렸느냐고 물으셨고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라고 대답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자기와 아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대답하셨다. 아이의 아버지는 큰 소리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했다. 무리들이 더 모여들자 예수께서 그 더러운 귀신을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이라고 부르신다) 꾸짖어 아이에게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 귀신이 나오자  아이는 죽은 것 같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났다.

28-29 (에필로그) 집에 들어가자 제자들이 조용하게 예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

>> 사건의 시작에 예수께서 남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다.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능력이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시작에서 귀신들인 아들을 데리고 온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았다. 제자들의 선생님을 찾았다. 예수께서 안계시자, 제자들이 자신들이 한번 해 보겠다고 나섰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제자들이 둘씩 파송을 받았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축귀의 권능을 주셨었다. 제자들은 그 능력이 여전히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여전히 그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한가지 잊은 것이 있다. 바로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님이 안계시자, 남아 있던 제자들은 돌아가면서 자신들이 축귀를 해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한 이유다. 단순한 예수님의 부재로 축귀의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축귀하지 않아서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명예를 걸고 축귀를 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 없는 세대는 결국 기도할 줄 모르는 세대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축귀 실패에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 아이에게 들린 귀신이 힘센 종류여서 제자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는’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다는 기록은 몇번 나오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셨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없다. 사실 제자들은 아직 기도를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신다고 기도를 가르치셨다.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께서 그들 중에 있다고 하셨다. 결론은 예수의 물리적 부재가 아니라 남은 제자들이 합심하여 축귀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또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믿음이란 무엇인가? 역설적이지만 믿음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예수께 간청했다. 믿는데 믿음이 없다니 어불성설 같이 들린다. 믿지만 믿음이 부족하니 주께서 부족한 부분을 도와달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의역한다면 ‘나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우심만(처분만) 바랍니다.’ 가 되지 않을까 한다. 결국 믿음이란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래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뢰하는 것이다. 내 뜻대로 무엇인가를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은 결코 믿음도 기도도 아니다.

>> 가장 좋은 것, 곧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하는 것이 기도요, 내가 할 수 없으니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다.